pax vobiscum
(peace be with you)
Written by VC
0 pax vobiscum
처음 그가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불꽃처럼 반짝이는 주황색 눈동자였다.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불길이 이쪽으로 옮겨올 것만 같아, 정신이 몽롱해 눈을 길게 꿈뻑이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시각에 이어 돌아온 감각은 청각이었다. 푸스스 풀을 스치는 소리와 두런두런 수근거리는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톤이 높고 자그마한 것 그대로 목소리의 주인들은 작달막했다. 멍하니 다섯 쌍의 뾰족한 귀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개중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 정신이 들어? 넌 누군데 여우나무 앞에 누워있어? 우리마을엔 아무나 못 들어오는데 언제 들어왔어? 혼자 온거야? "
정신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그는 이마를 짚었다. 몸이 무거워 상체를 겨우 일으켜세우는 것을 경계심어린 눈초리로 쏘아보는 다른 작은 인영들과 달리, 다닥다닥 질문을 쏟아붓는 소녀는 겁이 없었다.
" 기억… "
" 어? "
" 나는, 누구지? "
줄곧 침묵을 지키던 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얄궂게도 스스로에게 되돌아와야 하는 질문이었다. 랑은 청년의 물음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안그래도 궁금한 것이 산더미인데 해결을 주질 못할 망정 거기에 직격타를 추가하다니, 대체 뭐 하는 녀석이야? 그러나 기본적으로 의심이 결여된 순수한 심성을 가진 랑은, 어이없어함과 동시에 청년의 말을 위한 대답을 고민했다. '인간이지?' '귀와 꼬리가 없으니까 인간일 거야!' '위험하지 않을까?' '약해보이는 걸?' '있지, 랑은 듣지 않고 있는데…' 랑과 청년 둘 다 주변에서 속닥거리는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한참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랑이 마침내 결론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 일단! 마을로 가자! "
1 물과 나비
(1)
희미하게 보이는 인영은 허공에 녹아든 것처럼 흐릿하기 짝이 없어 무심코 눈을 비빈다. 감각은 어디에나 붕 뜬 채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흰색인지 검은색인지 알 수 없는 그림자를 바라본다. 한없이 오랜 시간을 그것만을 바라보고 있던 것 같다. 어쩌면 눈으로 향기를 맡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자같은 인영에게선 졸졸 흐르는 물가의 냄새가 난다. 신선하고 가슴 한켠이 아리도록 익숙한 향이다.
손바닥을 코에 가져다댄다. 정체되어 오랜 시간을 소비한 물비린내가 난다.
흐르는 물과 흐르지 않는 물, 두 개의 차이가 나와 그림자를 갈라놓고 있다.
언제부터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던 건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시야는 서서히 차단된다. 치륵치륵 우는 풀벌레 소리가 머리맡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져내린다. 싱그러운 초목의 향기. 꿈에서 깨어나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두 개의 달이 떠있다.
무슨 꿈이었더라.
몽롱한 머릿속을 더듬거리지만 기억은 물을 적신 화선지처럼 흐물거리며 경계를 잃어갔다. 그건 애써 주워담을 수 있는 조각이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그러모으려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은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남았다.
저 먼 어디선가 목을 긁으며 우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나무 아래 몸을 누이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가. 오른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천천히 기억을 헤짚었다. 땅 위로 드러난 단단한 뿌리에 기대기 전, 어쩐지 저를 부르는 느낌이 들어 여우나무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하기 전, 마을 밖에서 집으로 향하기 전, 마을 밖으로 나간 이유는… 아.
그제야 고개를 돌려, 뿌리 하나 너머에 둔 보따리를 보았다. 그 안에 들어있을 식재료들을 떠올리고 나서야,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보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걱정하겠는데. 슬핏 든 생각이 무색하게 아니나 다를까,
" 은월──! "
멀지 않은 곳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날이 저문 지 오래라 소리를 높이면 마을 주민들에게 폐를 끼칠 게 분명한데도, 음량을 줄이지 않는 목소리엔 저를 찾기 전까진 계속 소리를 지를 것이 분명해 곤란하게 웃고 말았다. 랑의 광할한 고집에는 그저 두 손발을 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만류하거나 방해하지 않는 건 그 고집이 얼마나 올곧은 심성을 나타내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슬슬 나서 제 행방을 알리지 않으면, 잠들어있던 마을 주민들이 깨어나 화를 낼지도 몰랐다.
하늘의 색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길어야 반나절일 텐데, 어째서인지 오랜 시간 동안 굳어져있던 것같이 뻐근한 목을 좌우로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마을 밖으로 나갔던 원인인 보따리도 잊지 않았다.
*
은월이라 불리는 여우(비록 진짜 여우족은 아니더라도)의 일상은 단순하지만 역동적이다. 전자는 은월의 신체적인 특성과 더불어 그 자신의 성격이 원인이라면, 후자는 그를 처음 발견한 랑의 헌신 덕이다. 은월에겐 여우족 특유의 뾰족한 귀와 풍성한 꼬리가 없다. 순박한 마을 주민들이 이질적인 외형을 이유로 따돌림을 주도하는 일은 없지만, 아무래도 그에게 향하는 시선의 대부분은 동정과 연민, 일부 꺼림찍함을 담고 있어 은월은 촌장으로부터 살 곳을 지정받은 후 내둥 집 안에 있었다. 감추어진 달이라는 이름의 영향일까, 은월은 타인의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이름 때문이라기보단 원래 그의 성향이 그러하겠지만, 단순한 구석이 있는 마을 주민들은 그걸 모른다. 랑은 정말 필요할 경우에만 밖에 나설 생각으로 평상에 누워있는 그를 끌고 집 밖으로 나왔다. 은월이 불편함을 감추지 않아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의 뜻을 관철한다. 덕분에 은월은 식(食)의 문제를 자각하고 랑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찬 랑이어도 그에 한해 약한 구석이 있다는 걸 마을에서 가장 늦게 깨닫는다.
랑은 그가 죽은 듯 집에만 처박혀있는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 은월을 제 자식으로 여기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랑은 지극정성으로 은월을 끌고 이곳저곳 돌아다닌다. 마을 내부는 물론이고 마을 밖 사냥터 멀리까지. 오지랖이 넓다고 타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은월은 랑의 행동이 모두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의 마음은 풋풋하고 따뜻하다.
은월은 돌직구를 던지는 랑의 말투가 못내 좋다. 랑의 행동 하나하나에 안절부절 못하는 건 오히려 은월이 아닌 랑의 친구들 쪽이다. 랑과 그 친구들의 조합은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보면 제법 재미있다. 가장 먼저 앞서나가는 랑을 필두로, 생각한 바를 그대로 입밖에 내놓거나, 그 생각에 딴지를 걸거나, 앞의 둘 모두를 종합하거나, 가장 수줍기 때문에 가장 뒤에서 주변 상황을 살펴보거나. 제대로 역할 분담이 되어있어 은월이 끼기에 마땅치가 않다. 애초에 은월은 저만 보면 안쓰러워하며 챙겨주지 못해 안달인 여우들과 동행하기보단 혼자 다니는 걸 선호했다.
은월은 랑에게 발견되기 이전에 무슨 일을 하고 누구와 함께 지냈는지 알고 있는 바가 없다. 그래도 여우마을 특유의 풀냄새에 익숙해질 무렵이 되자 자신이 어떠했을 지 어렴풋이 감을 잡는다. 불필요한 일을 싫어하지만 주어진 역할이라면 끝까지 떠맡는다(랑이 말하길 그건 고지식한 거란다). 호불호의 경계가 흐린 편이나 확실히 좋아하는 건 있다. 여우족과는 다른 인간에 대해 연로 있는 마을 어르신으로부터 대충 설명을 들었지만, 의외로 신체능력은 뛰어난 편이라 랑의 사냥을 쫓는 데 무리는 없다. 몸의 근육과 손에 박힌 굳은살에서 짐작은 했다. 은월의 신체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에 이골이 나있다. 그리고 말수가 적었던 것 같다. 랑의 거침없는 질문에 대답을 뭉뚱그려 하다보면 금세 입술이 바짝 말라버린다.
1 물과 나비
(2)
" 은월, 은월. 오늘은 어디까지 갈까? "
" 너무 멀리 나가지 마. 촌장님 걱정하신다. "
" 네~에~ 그러니까 오늘은 넷째 구간까지 나가보자. 그제 못 잡은 거 다 잡고 말테야! "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방방 뛰는 랑을 보며 은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롱 아주머니로부터 한숨을 쉬면 영혼의 조각이 빠져나간다며 타박을 들은 후부터 한숨이 습관화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고치려 노력하고는 있지만 도통 개선되질 않았다. 그 최대의 원흉이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자신을 부르고 있으니 조각이 아니라 혼 자체가 흘러나가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랑의 조부인 촌장이 하루가 무색하게 호기심이 자라나는 랑을 보며 걱정하지 않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너무 방임주의가 아닌가? 랑이 주워왔으나 랑에게 보살핌 받기는 커녕 오히려 본의 아니게 랑의 보호자, 또는 감시자가 된 은월의 심정은 착잡했다. 랑이 보이지 않으면 은월에게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 행방을 몰라도 은월이 찾겠지~ 하며 간단하게 관심을 돌려버리는 마을 사람들의 행동에 은월은 처음엔 의아해하다가 이내 익숙해졌다. 그러나 익숙해진 건 익숙해진 거고, 어째서 자신이 랑의 일거일투족을 알고 있는 게 당연한 건가. 사실 은월은 랑이 말하는 것처럼 기운차게 움직여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기는 것을 선호했다. 돌아다닌다고 해도 여럿보다는 혼자가 편했다. 그렇기 때문에, 은월을 랑과 묶어 생각하는 마을 여우들의 사고방식의 이유를 은월로선 알 길이 없다.
" 빨리 와! 얘들은 먼저 가있는댔어! "
" 후… "
랑의 자유의사를 막을 생각은 전혀 없지만, 오늘이야말로 집에서 명상할 계획이었는데. 역시 무리였나. 다시 한숨을 내쉬며 은월은 랑의 뒤를 따랐다.
*
" 가라, 여우령! "
랑은 마치 사냥개를 부리듯, 소환되자마자 제 주위를 빙빙 돌던 붉은 기운을 쏘아보냈다. 거기에 정통으로 옆구리를 얻어맞은 붉은 독 개구리가 깨룩거리며 펄쩍 뛰어올랐다. 반사적으로 저를 공격한 여우를 향해 머리부터 들이밀며 달려들었으나,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막혀버렸다. 은월은 개구리의 정수리를 힘을 실은 주먹으로 쳐내고 가볍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 …랑. "
" 아~ 아 여우령도 참, 저쪽 방향으로 몰아 끝내라니깐. "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듯 딴청을 피우는 랑을 보며 은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충분히 마무리를 짓고 피할 수 있었을 걸 부러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던 것이 분명했다. 은월이 도중에 끼어들리라 예상하고 있었겠지. 랑의 어리광과도 같은 행동에 딱히 거부감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자신의 몸은 소중하게 챙겨줬으면 했다. 만약 은월이 타이밍이 늦었으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 잡았으면 됐지 뭘. 오늘 저녁은 개구리 구이다! "
저녁으로 치기엔 한참 이르다만. 은월이 그리 반문했다. 시선은 여전히 개구리를 향한 채였다. 랑이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타 저편에서 습기 머금은 풀 위로 데굴데굴 열심히 굴렀지만, 이미 옆구리에서부터 시작한 화상이 몸의 절반을 덮은 채였다. 반쯤 시꺼멓게 익은 개구리는 조금 경련하나 싶더니 축 늘어졌다. 살이 타는 냄새가 고기 냄새로 맡아지는 건 은월이 여우족들에게 익숙해져서만은 아닐 것이다. 사전 지식이 없는 은월은 여우족이 가르쳐주는 것들을 그대로 흡수했다. 종종 의심도 하지만(주로 랑에 한해), 이제 외양만 다를 뿐 내면은 어엿한 여우족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물들었다.
은월은 또다시 무의식 중에 내뱉으려던 한숨을 삼키며 개구리에게로 다가갔다. 숨통이 끊어진 개구리는 말그대로 노릇노릇 익어있었다. 촌장의 후계라는 이름값을 하는 것일까, 랑의 정령은 또래 여우족들 중에서도 강력한 편에 속했다. 그 힘을 좀더 다듬으면 효과는 배가 될 텐데, 천둥벌거숭이마냥 가만히 있길 싫어하는 랑에게 조금 더 집중해서 수련하라는 건 소 귀에 경읽기였다.
은월은 개구리의 크기를 눈대중으로 가늠하고 허리끈에 묶어두었던 소도를 꺼내 가볍게 휘둘러 사지를 잘랐다. 근방에 있는 녀석들 중에서도 꽤 큰 몸집으로 식사로 하기에 양은 풍부해보였지만, 등거죽 아래 심장 옆의 기관에서 나오는 독이 몸전체에 골고루 퍼져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독을 태워보아야 먹을 것이 못되기에 큼지막한 몸통을 버리고 나면 남는 건 독이 닿지 않아 선홍빛으로 번들거리는 일부 기관과 네 다리 뿐이다. 그가 하는 양을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지켜보던 랑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면 애매한 시간에 불려나오는 바람에 식사를 하지 못했다. 랑이야 평소 행태로 보아 일어나자마자 은월에게 달려왔을 테니 말할 것도 없다.
은월은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결단을 내리고 크게 찢은 개구리 뒷다리를 랑에게 넘겼다. 랑은 군말 않고 받아들었다. 뼈라 부르기도 민망하게 물렁해진 뒷다리를 모조리 집어삼키고 나서야 랑은 은월을 보았다. 은월은 다리를 뜯어낸 접합부를 조금 뜯어 우물거리고 있었다.
1 물과 나비
(3)
축제라는 것이 열렸다.
'라는 것'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정확히 이를 칭하는 명칭이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달이 첫 번째 달에 가장 가까이 붙을 무렵이면 언제나 이렇게 모두가 모여 떠들고 놀았다고 했다. 여우족이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고는 있지만 공동체주의라기보단 개인주의에 가까운 터라, 은월은 생소한 눈으로 서로에게 지시하며 바삐 움직이는 여우들을 바라보았다.
" 어이 비실이, 뭐해? 넋 놓고 있지 말고 저리 가서 돕지 않고! "
앞이 보이긴 할까 의심이 될 정도로 높이 가재도구를 쌓아든 여우가 은월을 툭 치고 지나갔다. 멀뚱그레 옆으로 밀려나 바라보고 있자니 참으로 분주하면서도 기운이 넘쳤다. 무언가에 대한 열정이라는 건 신기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들뜬 감정이 옮겨와 심장이 쿵쾅거리며 제 존재을 알렸다.
여우들이 축제 도구를 내다놓는 걸 돕기 위해 짐을 든 여우의 뒤를 따르자, 저편에서 짐을 내려놓고 한숨을 돌리던 고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 마침 잘 왔다, 랑이랑 얘들 어딨는지 알아? "
" 아이들이라면 촌장님네 집에 모여있지 않았습니까? "
" 응? 없던데? 촌장님은 너라면 알 거라고 하셨고. "
" 하아…"
보호자가 왜 모르냐는, 의문 하나 섞이지 않은 시선에 알았다고 대답하며 은월은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랑과 아이들이 있을 만한 곳은 정해져있었다. 첫째가 여우나무 뒤쪽이고 둘째가 마을 외곽의 풍성한 수풀, 아주 예외적이지만 두 곳에 없으면 마을 밖의 사냥터가 셋째였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패턴이라 분명 마을 여우들도 이를 꾀고 있을 텐데 어린 여우들을 불러모으는 건 언제나 은월의 몫이었다. 여우들 중에는 주술에 능한 이도 있으니 아예 호출용 주술을 장신구에 걸어 주면 되지 않나 이따금 생각했지만, 굳이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사실 여우들이 은월에게 어린 여우들을 맡기는 이유가 여타 일들─이를테면 단독으로 사냥을 보낸다거나 호족의 동선을 살피게 한다든가 하는─이 그에게는 위험해보이기 때문이란 것을 은월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전부터 호족과 여우족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때문에 어른들은 호족의 하수를 자처하는 하이에나의 영역에 아이들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주곤 했다. 하지만 한창 뛰놀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심신을 달구는 아이들에게 체벌이 동반되지 않은 꾸지람은 있으나 마나였다. 요즘 들어 호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들려오는데 마을 어른들 중에는 하루종일 아이들의 옆에 붙어 감시할 만한 여유와 체력이 있는 여우가 없다.
" 은월, 오늘 축제에서 누가 호스럼 춤 추는 줄 알아? "
" 글쎄. 이번엔 암여우가 추겠지. "
축제가 무르익을 무렵 마을의 여우들 중 하나가 차려입고 나와 호기롭게 몸을 흔들며 흥을 유도하는데, 이를 호스럼 춤이라고 불렀다. 딱히 정해진 순번은 없지만 대게 이전 타자와 반대되는 성별이 맡게 되었고, 지난 번에 덩치가 큰데도 날렵한 숫여우가 추었으니 이번에는 암여우의 차례였다.
" 베─ 이번엔 내가 춘다구. 은월 바보. 아무리 얘기 안했다지만 정말 모르고 있었구나? "
" 랑, 네가? "
혓바닥을 죽 내밀고 랑은 뾰루뚱하게 고개를 돌렸다.
*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초를 태웠는지 마을 곳곳에서 청량한 향이 흘러나왔다.
불빛에 흐려진 그림자가 하늘하늘 흔들리며 곡선을 그렸다. 랑이 생에 두번째로 추는 춤은 부드럽고 활력이 넘쳤다. 허공으로 솟구치듯 뛰어올랐다가 바람을 머금은 천을 흩날리며 내려앉아, 천천히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는 춤은 마디마디 구절별로 나누어 배운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저 하나의 춤으로 자연스러웠다. 여우들의 흥을 싣고 바람은 모닥불을 휘감아 불씨를 띄웠다. 타닥거리며 타는 불꽃이 붉게, 희게, 이따금 파랗게 피어올랐다. 언제 저렇게 연습했는지 원, 역시 내 손녀야, 촌장님이 저편에서 흐뭇하게 웃으며 자랑스러워했다.
한 번 달아오른 공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랑이 하늘로 펄럭이던 긴 천을 잡아당겨 어깨에 두르는 것으로 호스럼 춤이 끝나자, 모닥불 주위로 모여든 여우들은 제각각 짝을 맞춰 편안하게 몸을 움직였다. 눈치 빠른 악사는 이미 잔잔하고 나지막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은월은 호흡이 잔뜩 흐트러진 채로 이쪽을 향해 걸어내려오는 랑을 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춘 것 같은데도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먹구름이 내려앉은 얼굴이었다. 아, 눈이 마주쳤다.
" 랑. "
랑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걷던 속도 그대로 은월을 지나쳤다.
이런,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구나.
─────
:은월도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다면, 하는 이야기. 설정 날조.
썰 모음식이기 때문에 문체가 제멋대로인 건 어쩔 수 없음...ㅇ<-<
호스럼은 순우리말로 호스운 느낌,
호습다는 무엇을 타거나 할 때 즐겁고 짜릿한 느낌이 있다는 뜻입니다.
<설정>
1. 미우미우에서 깨어난 뒤 상식을 익혀가는 은월. 여우족에 비해 신체적인 제약이 있긴 하지만 싸움이 몸에 익어있기에 그럭저럭 야매같은 박투술을 사용한다. 그래도 약하다고 랑이 자신의 정령을 은월에게 붙여주려 했지만 은월이 단호하게 거절함.
2. 남녀가 유별나.....서가 아니라 랑은 아직 저 혼자 살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생활적인 측면에서) 판단한 촌장님 탓에 아직 독립하지 못했고, 은월은 혼자 지낸다. 하지만 자고 있을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 랑에게 끌려나가 사냥을 하거나 마을 여우들의 심부름을 한다. 저녁은 항상 둘이 함께 먹는다.
3. 은월은 미우미우에서 총 2번의 '축제'를 경험한다.
4. 호족은 성격이 상당히 불 같아서 여우족과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 두 종족은 서로 상호불가침을 암묵적으로 약속한 상태. 다만 공간적인 범위가 애매해서 사냥할 때 종종 충돌이 일어난다.
'글 > 메이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데몬/ 냉장고를 열었더니 썰 3.5 (1) | 2015.06.27 |
---|---|
프리은월/ 냉장고를 열었더니 썰 3 (0) | 2015.06.07 |
프리은월/ 냉장고를 열었더니 썰 2 (0) | 2015.06.03 |
프리은월/ 냉장고를 열었더니 썰 (0) | 2015.05.28 |
베타알파/ 늠름한베타가보고싶었을뿐 (0) | 2015.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