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비친 시간

백업2

글/그외2015. 10. 2. 02:27

13.8.10 

벨제바브/미키오가

 

 

 

 


어른들이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았다고 짖궂게 이야기하는 시절, 나는 어린 나의 우상과 만났다.

그를 만난 것은 내 인생의 크나 큰 전환점,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였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내 손으로 추억을 구겨버린 나는 바보였다. 세상에 둘도 없을 그런.

 





복도 저편으로부터 들려오는 괴성에, 창틀에 두 팔을 걸치고 있던 미키는 상념을 깨고 소리의 음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모기가 앵앵거리는 것만치 작다가 점점 크게 울렸다. 더불어 발  밑에 대리석으로 된 복도가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여느 평범한 고등학교라면 지진이라도 난 것이 아닌가 하며 학생들이 대경실색하여 뛰어나왔겠지만, 이곳 세인트 이시야마 고교에서는 보여지는 반응이 사뭇 다르다. 교실 창문을 열고 기웃거리는 학생이 몇 있긴 하지만 대부분 또 시작이야, 질린 얼굴로 하던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옆동네의 이시야마 고교의 깡패들이 그네들 고교 건물이 붕괴되고 세인트 이시야마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한 이래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소동에, 세인트 이시야마의 학생들 모두가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다.


미키는 점점 더 강하게 울리는 진동을 흘려보내며 복도 저편을 응시했다. 만화에서나 볼 법한 먼지구름과 함께 엄청난 효과음을 동반하며 달려오는 청년이 있었다. 아, 오가. 미키가 반갑게 한 손을 들어 인사했다.

평소라면 인사 받은 당사자는 자신에게 인사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쌩하니 앞만 보며 달려가버렸겠지만, 오늘의 오가는 웬일인지 끼이익─ 지독한 마찰음을 일으키며 미키의 앞에 멈춰섰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가의 뒤에 매달린 갓난아기가 정말 용케 떨어지지 않는구나 따위를 생각하며 얼굴 앞에 자욱한 먼지를 손으로 휘휘 저어 밀어내던 미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가가 일으킨 먼지구름이 허공에 떠있다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시야마(세인트 이시야마의 학생들은 이름이 비슷하다고 동급으로 여기지 말라며 '이시야만' 이라 부르는) 패거리가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나타났다. 모두 오가를 뒤쫓고 있는 모양으로, 상당히 지쳐보였다. 거칠게 오가의 행적을 묻는 피어스(칸자키)에 미키는 말없이 오가가 달려가던 방향을 가르켰고, 그들은 오가 이 자식─! 잡히면 보자─! 따위의 말을 중얼이며 미키를 지나쳐갔다. 패거리의 끄트머리에 잔뜩 울상이 된 얼굴로 허우적대는 후루이치가 있었다. 그는 미키를 발견하자마자 앞서 달려가는 패거리를 슬쩍 살피더니 흐악, 거친 숨을 내뱉으며 미키의 옆에 섰다.
 

 

" 오늘도 시끌벅적하네. 역시 혈기가 왕성한 깡패들은 달라. "
" 거기서 나는 좀 빼달라구. 도대체 왜 매번 이렇게 끌려다니면서 생고생을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
 

 

후루이치가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쁜 호흡을 가라앉히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나의 노고를 알아줘, 라는 태도였지만 하하 입꼬리를 올리면서도 미키는 전혀 공감하는 표정이 아니어서, 후루이치는 도대체가 이 세상에 내 심정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거냐? 하며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
" 아─ 그게 말이지. 오가 녀석이 쓸데없는 질문에 답을 못해서… "
" 쓸데없는 질문? "
"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쓸데없다고나 할까, 초초초초~심자적인 질문이라고나 할까… 응. 원초적이지만 순진한 그런 류의 물음이었지. "
" 쓸데없고 초심자적인데다, 원초적이고 순진하다고? "
" 훗훗훗. 그렇게 알고 싶으냐 미키? "
 

 

눈가를 치켜접으며 스물스물한 손길로 어깨를 쳐오는 통에, 미키는 하마터면 옆에 있는 사람이 중학교 시절의 추억을 공유한 친구라는 사실을 잊고 어깨를 잡아채 쌍타장을 날릴 뻔했다. 두 사람의 뒤에 위치한 창문에서 낯익은 얼굴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지 않았다면 정말 온 힘을 다해 공격할 뻔했다. 후루이치 본인은, 그것이 이시야마 최강의 깡패라는 청년의 옆을 지키며 꾸준히 목숨과 명맥(이 문맥으론 건강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다)을 유지해온 자신의 운 덕분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모를 테지만.
 

 

" 요. 거기, 주둥이 그만. "
" ─윽. 오가 너 거기 숨어있었냐? "
 

 

오가는 가벼운 발놀림으로 창틀을 넘어 올라왔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창밖에 매달려있었다는 소리?! 후루이치는 기가 막혔지만, 눈앞의 청년과 함께 한 이래(특히 그가 웬 벌거벗은 갓난아이와 조우한 이래) 주욱 보아온 '더욱 놀랍고 무서운' 것들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었다.


오가는 맨들맨들하고도 얄밉게 씩 웃으며 후루이치에게 다가갔다. 내가 그걸 사람들 귀에 흘리고 싶지 않아서 옆구리 채인 무소마냥 도망다닌게 아니란 걸 너도 잘 알 텐데. 아니, 어차피 넌 대답 못했고… 아. 후루이치가 일순 무언가를 깨달은 듯 의식의 전구를 밝혔다. 동시에 헛숨을 들이키며 난 아무것도 몰라, 하며 오가를 외면했지만 후루이치의 깨달음은 야생동물 뺨치는 오가의 감각에 이미 걸린 후였다.

한편 미키는 오가의 출현으로 인해 허리가 동강 끊긴 후루이치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머릿속에 생각을 굴리는 건 한순간으로, 물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 것은 후루이치가 오가에게 멱살이 잡힌 채 짤짤 흔들리는 와중이었다.
 

 

" 그 질문이라는 게 혹시… 그쪽 경험에 대한 거야? "
 

 

움찔. 격하게 흔들리던 후루이치와 그를 열심히 쉐킷shake-it 하던 오가가 동시에 멈췄다. 끼기긱, 오가의 고개가 녹슨 로봇처럼 돌아갔다. 덕분에 오가의 손에서 빠져나온 후루이치가 잽싸게 미키의 옆에 바짝 붙어섰다. 여차하면 그를 방패로 삼겠다는 불굴의(그러나 비밀스런) 의지를 불태우면서.
 

 

" 너너, 그걸 어떻게…! "
" 그쪽에 관한 질문인데 답을 못했다는 것 즉, 경험이 아예 없… "
" 앗, 타겟 발견! "
 

 

미키가 추론해낸 말은 낭랑하게 메아리치는 목소리에 끊겨버렸다. 복도 끝에서 모습을 드러낸 유카를 필두로 좀전까지 오가를 뒤쫓던 인영들이 눈을 번뜩이며 하나둘씩 나타나자, 오가는 낭패한듯 혀를 차며 미키와 후루이치를 내버려둔 채 다시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시야마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다시 재개되며, 두 사람은 금세 잊혀졌다. 멀뚱히 눈을 깜빡이는 미키의 어깨를 후루이치가 팡팡 내리쳤다.
 

 

" 덕분에 살았다, 야! 오가 녀석 눈치는 빨라가지고… "
" 그것보다. 아까 이야기, 내 생각이 맞다는건가? "
 

 

슬핏 가늘어진 눈매가 발하는 이름 모를 날카로움에, 후루이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겨울도 아닌데 뭐지. 그는 옆의 고지식한 친구가 옛날부터 오가에 대해서는 그 고리타분한 면모를 벗어던지는 눈빛을 보내던 사실을 애써 기억 저편으로 몰아냈다. 대답을 요구하는 빤한 시선에 못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이자, 미키는 턱을 문지르며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후루이치는 하교 시간까지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벌써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턱없이 지쳐버린 몸을 창틀에 기댔다. 운동장 쪽으로 흙먼지가 날리는 걸 보니 밉상인 친구는 1층에서 허덕이고 있는 듯 했다.

그때, 다음 수업시간이 10분 남았음을 알리는 예비종이 교내에 울려퍼졌다. 벌써 점심시간이 가버리다니… 후루이치는 자유인이 누릴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해 서글픈 고민에 빠졌다.
 

 

" 다음 수업은 발표라서, 먼저 실례할게. "
" 어 그래, 잘 가라. "
 

 

힘없이 흐느적거리던 후루이치의 귓가에 미키의 인사가 들어왔다. 예비종이 울렸으니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위해서라면 슬슬 교실에 들어가야하는데, 오가와 그를 쫓는 이시야마 패거리들은 아직도 1층에서 고전 중이었다. 에이, 혼자라도 들어가야지. 이래저래 별의 별 일을 다 겪었어도 마음만은 평범한 학생인 후루이치는 오징어처럼 힘이 빠진 상체에 힘을 주고 교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저 녀석, 그때의 순진함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예고편을 시사하는 것 같은 여운을 남기는, 어둠 속에 음흉함과 사악함을 잘 벼려놓은 것 같은 친구의 미소를 떠올리며 후루이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3.8.23

벨제바브/미키오가






" 아─ 날씨 좋네. "
 

 

기지개를 쭉 펴며 돌아본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새파래서,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으면 얼굴의 윤곽이 비칠 것 같았다. 아직 가을이라고 치기엔 이른 늦여름인데도 저 청량함은 무엇일까. 운동장을 달리는 육상부의 왁자지껄한 소음도 층을 올라가며 자잘하게 부서졌다.


사람은 묘하게, 한적하기 짝이 없는 일상에 저렇듯 맑은 하늘이 덧붙여지면 묘한 일탈감을 느끼게 된다. 이를 테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을 것만 같은.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래, 당장 죽어도 아무런 문제도 미련도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물론 잔잔한 이 충동에 몸을 맡겼다가는 삶을 포기하는 셈이라, 평소와는 다른 나른함을 만끽할 뿐이었다.


순간의 심정으로 말하자면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지만.


아쉽게도 현실은 개인의 사정을 일일이 고려해주지 않는다. 자신을 조심스레 부르는 목소리에 미키는 정신을 차렸다.
 

 

" 저… 미키군. 생각에 빠져있는 와중에 미안한데, 선생님이 지난 번 설문조사 걷어오라고 하셔서. 오늘까지만 모아서 교무실 선생님 책상 위에 두고가면 될거야. "
" 아. 알았어. 전해줘서 고마워. "
 

 

노란색 머리띠의 소녀는 약간 붉어진 볼을 애써 감추며 꾸벅 고개를 숙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보통 학급을 통솔하는 건 반장이지만, 육기성의 일원인 미키는 선생님들로부터 큰 신뢰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학급의 자잘한 일거리를 (떠)맡아하는 편이다. 이번 주 교무실 청소 담당인 소녀는 한 주 내내 선생님들의 메신저 역할로 하고 있었다. 사교성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지만 반 전체를 다 꾀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미키가 이번 한 주 동안 소녀와 말을 나눈 횟수는 반 년간 같은 반으로 지내며 나는 대화의 양을 가볍게 넘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저렇게 얼굴을 붉히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게 된달까. 오히려 눈치가 빠른 편에 속하는 미키는 며칠 전부터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옆자리 짝궁이 소녀가 다가올 때마다 히죽거리며 옆구리를 팔꿈치로 쳐오는 것은 견딜만 하지만, 어느 샌가 퍼진 소문이 육기성에게까지 들어가 나타나는 반응들은 참기가 힘들었다. 특히 존경하는 이즈마 선배가 묘한 눈으로 웃으며 어깨를 툭툭 치던 어제 아침은 정말, 괜시리 버벅거리다가 잽싸게 인사를 하고 반에 돌아와 처박혀있지 않았던가. 어째서 자신은 가볍기 그지없을 소녀의 호감(연정까지 급을 올리기도 참 애매했다)에 휘둘려야 하는지. 차라리 고백을 해주면 좋겠다고 미키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좀전의 묘한 일탈감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 오늘도 그냥 가는구나, 마에미. 언제쯤 데시해오려나? "
" 남의 고생을 너무 즐겁게 바라본다, 너희들? "
" 그─거─야. 천하의 미키님께서 허둥대는 게 얼마만에 보는건데. 안나올 때까지 우려먹어야지. "
 

 

짝궁이 넉살좋게 낄낄댔다. 학기 초에야 미키의 범상치 않아보이는 기운과 흉터(나중에 단순한 상처로 격하되었다)에 반 전체가 어수선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술렁거림도 잦아들었다. 1학년이 육기성의 일원이 되었다는 경이로움은 여전히 존재했으나, 이제는 미키를 그들을 대표하는 동급생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몇 차례 소소한 사건도 있었지만, '이시야만'의 야만인들을 미키가 나서서 처리하고 그 대표격 양아치들과 크게 한 판을 벌인 이후 거리감을 줄어들었다. 말하자면 이웃집 영웅 같은?


미키는 입을 비죽이다 한숨을 쉬었다. 이성 문제는 본인에게야 중대사지만 남들에겐 좋은 구경거리일 뿐이다.
 

 

" 웬 한숨이야. 여하튼 우리는 기대중이라고~ 마에미가 언제쯤 직구를 던져올 지. "
" 하? 설마 내기라도? "
" 당연하지! 나는 내일 점심시간 이전에 온다에 삼백 엔. 참고로 판돈은 백 엔부터야. "
" 당사자를 끌어들이려는거냐?! "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가 집중되는 시선에 보이지 않는 꼬리를 내렸다. 짝궁은 여전히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성격이나 성적이나 교내 지위나, 그리 만만하지 않은 미키를 놀려먹을 기회를 두고두고 맛보려는 심산이다. 미키는 다시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가? 묻는 짝궁에게 산책, 이라는 짧막한 대답을 던지고 교실을 나서며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 조여있던 숨통이 트이는 느낌에 힘이 들어갔던 어깨가 다시 내려갔다.


한적한, 그러나 군데군데 웅성이는 소음이 돌아다니는 복도를 걸으며 미키는 목적지를 고민했다. 육기성이 되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수업시간을 무조건적으로 준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모범생으로 지내려면 열심히 수업을 들어야하지만, 각종 동아리 활동으로 유명한 세인트 이시야마 고교의 육기성쯤 되면 간단한 핑계로도 수업 도중에 빠져나올 수 있다. 한 발 더 나아가자면 땡땡이도 언제나 가능하다.


열린 복도 창문 밖으로 문득 시선을 주니, 교실에서 보고 넋을 놓았던 푸른 하늘이 두 눈에 들어와 박혔다. 멍하니 돌아가던 생각이 멈췄다. 옥상에나 갈까.
 

 

살짝 삐그덕거리는 옥상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청량한 바람이 볼을 스쳤다. 적당히 햇살에 데워진 철봉으로 걸어가 팔꿈치를 얹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운동장에 그려진 트랙을 따라도는 육상부와 체육복을 입고 수돗가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이 보였다. 흔하기 짝이 없는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티끌 하나 없던 하늘에 뜯긴 솜사탕같이 하늘거리는 구름이 둥실 떠내려갔다. 이래서 깡패들은 일상다반사로 옥상을 소굴로 삼는건가? 적당히 따끈따끈하고 바람도 불고 경치도 좋고.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홀로 여운을 즐기고 있는 이 순간을 무자비하게 깨뜨린 것은 작은 웃음소리였다.


숨결과 같이 작고 고요해서 여느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바람소리인가 보다 흘려보냈을 테지만 미키는 그런 수식어로 설명될 학생이 아니었기에, 날카롭게 반응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기억 속에 문 손잡이를 꽉 돌려 닫고 들어온 문,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같은 눈높이에 보이는 생물이라곤 높이 날다가 잠시 지친 몸을 식히는 잠자리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답은 뻔했다. 미키가 서있는 곳보다 높은 곳에, 몸이 가려져있는 것이다.


육기성의 일원이 땡땡이라니. 대서특필의 특종감까지는 아니어도 웅성거리는 소문으로 금세 퍼져버릴 일이다. 안그래도 요새 묘한 소문때문에 이즈마 선배까지 히죽거리며 격려 아닌 격려를 해주시는데… 부담을 늘릴 수는 없었다. 미키는 눈대중으로 문이 달린 벽을 보았다. 미약하지만 분명히 인기척이 있다. 진즉에 눈치채지 못하다니 나도 아직 수련이 멀었구나. 일단은 알아차리지 못한 척, 어깨의 긴장을 풀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숨을 몇 번 고르게 쉬다가 기척을 지우고 몸을 움직였다.

 

어떻게 보면 뻔한 전개로, 그러나 미키 자신은 전혀 예상치 못한 흐름으로, 그곳에 누워있는 것은 그의 옛 친구였다. 수업시간인데도 아랑곳않고 팔자 좋게 대자로 뻗어있는 그의 옆에는 그가 언제나 매달고 다니는 간난아기가 있었다. 팔과 다리를 위아래로 쭉 뻗고 보호자의 주위를 굴러다니다가, 미키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듯 멈춰서선 눈을 부릅 뜬다. 이유 모를 아기의 적대감에 미키는 난처한 표정으로 사다리를 붙잡고 있던 한 손을 떼어 가볍게 흔들었다. 나름 친화력을 호소하듯 웃어보였으나, 아기의 이유 모를 분노만 가중시켰는지 아기는 친구의 옆구리에 딱 달라붙어 미키를 노려보았다.


" 벨 도령… 이라고 했던가? 왜 나만 보면 그렇게 싫은 표정을 짓는거야? "


사다리에 매달린 어중간한 자세로 있기가 뭐해서 올라와 친구와 사람 서있을 만큼 떨어진 위치에 앉자 이제는 으르렁대는 아기를 향해 미키가 말을 던졌다. 애초에 긍정적인 대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었지만 미키가 묻자마자 새끼손가락을 쳐들며 다앗──! 만을 외쳐대니 더 말을 꺼내보려고 해도 입이 텁 막혀버린다. 얼마 전 TV에서 사촌동생이 자신을 이유 없이 너무 미워해서 슬프다고 토로한 어느 아이돌이 떠올랐다. 함께 프로그램을 보던 어머니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러겠지, 라고 단정하는 것에 동의했었는데 이제 와보니 자신이 딱 그 아이돌의 처지와 똑같다. 미키는 마음 속으로 아이돌에게 심심한 사과를 표했다. 그래봐야 지금 현실이 달라지는 것도 없었지만.


아기, 벨 도령이 꽤 시끄럽게 삿대질을 하고 있는데도 보호자는 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어제 밤이라도 샜는지 힐끔 얼굴을 보니 눈가가 거뭇한 게 그 이유인 듯 했다. 미키는 아기의 보호자이자 그의 옛 친구, 오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고 있는 오가는 그 유명한 깡패들의 우두머리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치켜올라가 사나워보이는 눈매는 완만하게 내려가 있었고, 약간 벌어진 입술은 달싹거리지도 않고 조용했다. 좋게 말하면 평온해보이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평범한 나머지 어벙해보였다. 그때랑 변한 게 없네. 창가를 향해 고개를 틀고 책상을 베개 삼던 중학교 시절의 오가 역시 이렇듯 평온하고 어벙한 얼굴이었다. 그때는 볼이 책상에 눌려 입술이 좀더 벌어지는 바람에 침도 몇 번 흘리고 했다는 사실만이 지금과 달랐다.


문득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가늘지만 긴 바람이 잠들어 있는 이의 머리카락을 술렁이고 이내 그를 지켜보는 이의 뺨을 스쳤다. 미키는 홀린 듯 보이지 않는 형세를 따라 고개를 올렸다. 오늘 하루만 몇 번이고 보았던 하늘이 가늘게 뜬 눈동자에 들어와 박혔다. 이렇게나 밝은데도 태양은 보이지 않고 지표를 달굴 따름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이던 아기도 잠잠해졌다. 여전히 미키를 향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지만, 그렇다고 나른한 이 휴식시간을 깨뜨리기도 싫었는지 미키를 향해 핑- 코웃음을 치더니 그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물론 오가의 옆구리를 꽉 붙잡은 두 팔과 다리는 그대로였다.

 

 


 

 

 

 

 

13.9.14

벨제바브/후루오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야기





방학 기간의 주말이라는 건 정말 사족과 같은 날이다. 없으면 심심하지만 있다고 해서 딱히 무언가 좋다거나 기쁜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여분으로 주어진 잉여시간. 물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굉장히 실례되는 것이겠지만, 스스로가 그렇게 열심히 인생을 살아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후루이치에게 토요일 아침이란 등 뒤에 깔고뭉갠 쿠션과도 같다. 보이지 않고, 전신을 늘어지게 만든다. 하얀 블라인드 아래 굴절된 햇빛이 따사롭다면 나른함은 배가 된다.

그러고보면 어젯밤 늦게 잔 것도 아닌데 왜이렇게 졸릴까. 알람이 울리기 전에 굼벵이처럼 기어 탁자에 놓인 자명종을 누른 뒤, 후루이치는 함께 굴러 떨어진 쿠션을 등 뒤에 놓은 채 한 손을 들어 쩍 하품을 하는 입을 가렸다. 으하하아암. 반쯤 감긴 눈으로 입맛을 다시다가 몸의 무게중심을 뒤로 밀었다. 푹신푹신한 감촉이 등을 받치고 침대가 베개가 되는 모양새였다. 이대로 다시 자버릴까? 다시 스물스물 몰려오는 잠의 유혹이 창 밖에 지저귀는 새의 노랫소리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오늘 할 일도 없고. 중학생인데 학원같은 데 가지 않느냐 물으면, 후루이치의 집은 동급생들의 집보다 자식 교육에 관대한 편이었다. 부모님의 기대치가 낮은 것도 있고 후루이치 본인도 공부를 하면 성적이 나오는─ 어릴 때부터 꽤 영리한 축에 속했기 때문에, 탈선하여 제대로 엇나가지만 않는다면 괜찮아 하는 분위기랄까. 몇 없는 친구를 불러 놀러나가자는 아이디어도 번거롭게 일을 벌리는 느낌이 들어 떠올린 지 10초도 되지 않아 관두었다. 평소 아침 먹을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밑에서 아무런 부름이 없는 걸 보면 다들 제 할 일에 빠져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고보니 부모님은 주말 동안 시골에 내려갔다 오신다고 했다. 여동생이야 아침 일찍 친구들이랑 놀러나갔을 테고. 할 게 없는 건 나 뿐이군. 역시 잠이나 자는 게 낫겠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떠올리다가 후루이치는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닫았다.

정신을 차린 건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응, 뭐야… 눈을 몇 번 깜빡이자 흐릿한 시야가 선명하게 돌아왔다. 소리가 난 것은 후루이치의 앞, 새까만 모니터가 있어야 할 그곳에 모니터 대신 새까만 머리통이 그를 반겼다. …응? 저게 뭔가 싶었지만 푹신한 침대시트로부터 고개를 들기가 귀찮아 곁눈질하듯 흘려보았다. 까맣고 짧은 머리카락, 덩치로 보아 여동생은 당연히 아니고. 부모님일 리가 없고. 누구냐, 저 침입자는. 모니터를 향해 구부정히 앉은 저 자세는 상당히 낯이 익었다. 어제 오후 내내 자신이 취하고 있던 자세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그새 3시간이 흘러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아니어도 배가 고파 깼을 시간이다. 몽롱했던 정신이 서서히 뚜렷해지는 것을 자각하며, 후루이치는 상체만을 옆으로 가볍게 틀었다. 체내에서 두둑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척추를 타고 울렸다. 자신이 내고 있는 소음에 비하면 턱없이 작을 소리로 기척을 느꼈는지 새까만 뒤통수가 뒤를 돌았다. 요, 깼냐. 특유의 심드렁한 표정으로 후루이치와 눈을 마주한 오가는 다시 고개를 돌려 화면을 바라보았다.

또 왜 왔냐? 이번에는 목을 옆으로 틀며 후루이치가 물었다. 어떻게 들어왔냐, 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야 밑에 있는 누군가(있다면 동생 뿐이겠지)가 열어주었거나, 제멋대로… 이를 테면 저기 열린 창문으로 들어왔을테지. 여긴 1층이 아니라는 사실 따위 가볍게 씹어넘기는 육체적 능력의 소유자 아니던가. 후루이치의 질문에, 한참을 손에 쥔 컨트롤러에 집중하던 오가가 말을 툭 던졌다. 심심해서. 그의 대답과 동시에 스테이지를 깼을 때 틀어주는 신묘한 노래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이거 가택 무단침입이라고. 내용과 다르게 노기 하나 없는 목소리를 내며 후루이치는 상체를 일으켰다. 여전히 쿠션은 등에 받치고 다리를 쭉 피고는, 오가의 어깨 너머로 게임 화면이 보일 정도로 엉덩이만 움직여 이동했다.

오, 보스전이네. 나도 어제 여기까지 깼었는데. 어렵냐? 보스 피 절반 뺐을 때 쓰는 스킬이 완전 사기야… 걸리면 그냥 무한콤보다. 보스 스테이지의 시작을 알리는 BGM이 간략하게 흘렀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오가는 화면을 응시했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묘하게 긴장한 오가의 등을 알아차린 후루이치가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에 긴장하면 낚시에 걸려서 쓸데없이 MP를 소비할 게 분명한데. 하지만 원래 게임이란 건 남이 당하는 걸 보는 게 더욱 즐거운 법, 후루이치는 구태여 입을 열지 않고 편안한 자세로 오가의 게임을 관조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미적지근하고 햇빛이 따끈따끈하다,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13.9.2~9.8

벨제바브/ IF/ 배경은 인간계 기준으로 상당한 시간이 지났을지도 모르는 미래, 날조. 그리고 더 이어지는 일 없음....;( 

 



 

 

~1

 

석양이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풍경은 가히 장관이라 할 만 했다. 온갖 괴이한 것들이 들어차 있어도 자연계의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래봐야 뭐가 달라, 하며 귓등으로 흘려들었는데 이제는 그 말이 뇌리에 새겨진다. 인간계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노을이 붉게 산란한다. 인간계보다 더욱 현실감을 북돋우고 한 편으로는 마비시키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후루이치는 이내 고개를 휘 젓고는 퍽퍽한 바윗덩이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퍽. 단단하고 고른 흙이 분포한 이 일대 땅을 밟는 것 치고는 물컹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후루이치는 어깨를 부르르 한 번 떨며 진저리치는 몸을 달랬다. 찜찜한 표정으로 팔에 돋은 미약한 소름을 쓰다듬었다. 마음 같아서는 흙이 밟히는 저 아래에까지 단번에 뛰어가고 싶지만, 그러기엔 경사가 너무 가파랐다. 아 젠장. 이 느낌 정말 싫다고. 좀더 힘을 주면 푹 들어갈 것 같은, 

 

이 시체더미의 감촉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빈틈없이 맞추어진 퍼즐처럼 겹겹이 쌓인 시체들은 기겁할 정도의 분량이 모이니 하나하나의 개체는 커다란 풀장의 타일 한 조각보다 눈에 띄지 않았다. 제일 아랫부분에 있는 시체의 상태는 어떨 줄 몰라도, 후루이치가 밟고 있는 최정상부는 아직 핏기가 채 가시지 않은 만큼 따뜻했다. 단단히 끈을 조인 운동화 밑창으로, 아직 남아있는 온기가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 같아 후루이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신경 끄자. 광활하게 펼쳐진 숲 너머로 가라앉는 석양에 집중하려고 해도, 시각의 사각지대가 아닌 이상 자꾸 시야에 희끗하게 비치는 시체를 무시하기는 힘들었지만, 후루이치는 애써 소름을 누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즙을 짜내는 것처럼 붉은 피가 발아래 주룩 흘러내렸다.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오가가 앉아있었다. 불룩 튀어나온 등판을 의자삼아 무릎에 두 팔을 늘어뜨린 자세로 그는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가의 앞에는 울창한 숲지대와 노을이 펼쳐져 있었기에 그가 붉은빛을 시야에 담는지, 아니면 길고 단단한 나무들이 포진하는 숲의 그림자를 내려다보고 있는지 구분하긴 힘들었다. 후루이치가 내딘 곳이 속은 파인 공동이었는지 발이 푹 들어가며 일순 휘청였지만, 오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짧은 비명소리가 분명 들렸을 텐데도. 

 

후루이치는 입술을 세게 깨물며 중심을 바로잡았다. 그래도 무자비하게 흘러간 시간이 도움을 준 것이 있다면 기억이 닿는 과거까지만 해도 일반인보다 허약한 취급을 받던 신체가 상당히 단련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날을 떠올리면 어쩐지 아득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풍경으로, 시간의 저 너머에 한 초점으로 회전하는 과거는 어쩌면 즐거운 나날이 한가득이었을지도 모르지. 서로에게 딴지를 걸고 장난을 맞추는 그런 일상의 연속이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실」은 상상만큼 밝은 빛을 발하고 있지 않아, 나열하는 것만으로 하늘을 뒤덮어버릴 듯한 먹구름… 진득하게 묻어나올 늪의 잔해가 회상을 가로막았다. 잔인한 시선과 그만큼 붉게 물든 손이 망막을 스친다. 

 

인간의 정신이라는 건 유약한 주제에 쓸데없이 고집이 세서,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일 때는 백지처럼 새하얗다가 조금이라도 편해지면 금세 상념으로 뇌를 가득 채운다. 후루이치는 오가의 옆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짙은 인기척에도 오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요즘 계속 나만 떠들고 있는 거 알아? 

 


웃음기가 약간 섞인 후루이치의 말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꼭 닿지 않은 것처럼 오가는 대답이 없었다.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쓰게 일그러졌다. 그래도 후루이치는 입을 닫지 않았다. 분명 오가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까.

 

 

 



~2

그것은 기억의 서랍장에서 꺼내들면 갓 잡은 마물의 심장처럼 두근거리는 기억. 떠올릴 때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요동치는 박동이 왼쪽 가슴의 것인지 머릿속에 떠도는 허상의 것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박동은 기묘한 형상을 이루며 나에게 기억을 건넨다. 자, 하나, 둘, 셋. 이 기억을 받아들고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 지 볼까. 일그러진 웃음이 카운트 다운을 세기 시작하면.

옛날 옛날, 마계에는 여러 왕이 있었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서로 대립하던 왕들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조약을 맺었습니다. 조약의 내용은 특정한 상황이 아닌 이상 왕들 간의 직접적인 전투를 금지한다는 평화로운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악마들의 예상을 깨고, 조약은 오랜 기간 지속되었습니다. 유독 악명 높은 몇몇 왕들이 주도적으로 나서 그들의 힘을 제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약 없는 평화에 호전적인 성격의 마족들은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강한 상위 마족들을 포섭하며 세력을 늘려갔습니다. 이는 평화를 추진하는 왕들과 살육을 원하는 왕들의 분열을 야기했습니다. 불씨는 순식간에 커져, 두 세력 사이에 커다란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훗날 마계대전으로 회자되는 이 전쟁은 소수의 전설을 낳고 종결됩니다. 어느 쪽의 세력도 승리하지 못한, 불완전한 협정이 마계 전역에 퍼졌습니다.

마계대전에 참전했던 강력한 왕들 중 파리왕이라 불리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주제에 힘을 사용하길 귀찮게 여기는 풍륜아였습니다. 어느 날 파리왕은 인간계를 내려다보고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건 너무 많잖아? 그는 자신의 아들들 중 하나를 인간계로 내려보내 인간이라는 종족을 없애버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파리왕의 아들은 참으로 독특한 인간을 자신의 부모로 선택하고 맙니다. 그 인간은, 방대한 마족의 힘에 먹히기는 커녕 오히려 힘을 제어하며 자신을 가로막는 적들을 쓰러뜨렸습니다. 고전할 때도 있었지만 적들은 우후죽순으로 그의 앞에서 사라져갑니다. 그는 파리왕의 아들과 함께 마계로 넘어왔습니다. 파리왕에게 자신은 인간을 멸망시킬 생각 따위 없다, 당당하게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파리왕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가 가진 힘은 결국 파리왕의 아들과 콜라보─ 손을 잡았을 때 비로소 진가가 발휘되는 것. 무수한 잠재력을 가진 힘이 수명이 짧고 연약한 '인간'에게 있다, 그리고 그 힘은 마족과의 연계에 의해 폭발한다, 살육을 원하는 이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먹이'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는 생각보다 약하지 않았기에 자신을 잘 가드했지만, 중요한 힘의 원천이 사라졌을 때─ 그는 생각보다 어처구니없게 무너지고 맙니다. 그건 정말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습니다…




붉은 피, 이쑤시개 마냥 푹푹 꺾인 삼림,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 산과 강이 뒤바뀌고 물이 사라진 해양대지는 달의 표면처럼 울퉁불퉁하다. 허공에 떠오른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공중에 산재하는 흙먼지 때문에 시야가 뿌옇다. 바닥에 자갈처럼 깔린 살점들이 살벌해 눈을 돌릴 법도 한데, 모두들 넋을 놓고 한 곳만을 바라본다. 그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공통된 감정을 나는 알고 있다. 가장 아래에 있는 하찮은 것을 쳐다보던 시선이 정점에 오른 「악」을 마주하며 끝없는 공포로 변해갈 때.

그들이 원하던 살육은 시작되었다.





~2.5


괴상한 가면을 쓴 적이 빙글빙글 회전하는 구체를 아공간으로 던져넣었다. 다 타버린 재처럼 회색빛으로 흐릿해진 구체가 그 자리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오가가 갑자기 왼쪽 가슴을 부여잡았다. 가면 녀석이 꺼낸 구체 속에 벨 도령이 빨려들어갔으니 분명 저 녀석만 쓰러뜨리면 벨 도령은 원래대로 되돌아올텐데, 그러니 서둘러 적을 무찌르자고 말하려던 후루이치가 멈칫한 것은 그의 앞에 힐다가 아무런 미동 없이 가만히 서있었기 때문이다. 벨 도령에 관한 일이라면 가장 먼저 달려갈 사람-마족-이 바로 힐다, 벨 도령의 충실한 시종 아니던가. 왠지 모를 불안함에 후루이치가 그녀를 부르려고 입을 연 바로 그 순간, 힐다는 사라졌다. 문자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눈꺼풀을 한 번 깜빡이는 찰나였다.


히, 힐다씨…?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대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적이 쓴 가면의 표정이 마치 우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 역시 보험이 되어있었군요. 왕의 핏줄이라는 건가요… 하지만 소용 없습니다. 그녀가 사라진 건 반작용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

반작용? 무슨 소리야 그게. 네 녀석, 힐다씨를 어쩐 거냐!

「 전 그녀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답니다. 그녀에게 걸려있는 가장 근원적인 계약의 매개체를 지워버렸을 뿐. 당신 정도의 머리라면 이해하고 계실 텐데요? 」


이해. 그렇다. 하고 싶지 않아도, 후루이치의 머리는 이미 상황을 분석하여 결론에 도달한 상태였다. 보험이라든가, 벨 도령, 왕의 핏줄, 그리고 계약…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춤을 추듯 날뛰었다. 어이, 거짓말이지? 힐다씨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녀는 시종일 뿐이었다고. 그녀가 맺은 계약이라고 한다면 벨 도령은? 잠시만. 벨 도령은…?

미약한 신음소리가 그의 사고를 멈췄다. 소리가 난 곳으로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린 후루이치는 그제야, 오가의 몸뚱아리가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오가가 힘을 쓸 때마다 일렁이던 붉은 문양이 거미줄처럼 빼곡하게 그의 전신을 채우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지나쳐 검게 타오르는 듯 했다.


「 자.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오가 타츠미, 마왕의 부모. 이것이 바로 기다리던 전쟁의 시작입니다. 파리왕의 아들 만큼 선전포고의 효시로 어울리는 제물도 없지요. 」


언제나처럼 멀쩡하게 일어나, 굳은 얼굴로, 그의 의지를 관철하길 바랐다. 후루이치에게 있어서 오가는 그만큼 강한 녀석이었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가면을 쓴 녀석이 자취를 감추고 난 이후에도 일행의 몇몇 수완 좋은 녀석들에게 가면의 추적을 맡긴 뒤, 오가의 몸을 추슬러 마계에 마련된 은신처로 돌아왔다. 오가가 깨어나면 분명 언제나처럼 벨 도령을 되찾고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모두들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힐다에 대해서도, 분명 벨 도령을 되찾고 나면 그녀도 돌아올 거라고. 근거 따위 없는 막연하지만 굳건한 믿음이었다. 그 신뢰.

그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았던 걸까?

이미 나타난 결과에 대해 승부를 걸기란 그 무엇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무의식중에 외면하려들었던 후루이치는 뒤늦게 후회했다. 정말로 어쩔 수 없었지만, 그 말 만으로는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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