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비친 시간

그것은 탐스러운 과실.
선악의 구분이 나누어지기 이전, 모든 것을 향유하는 낙원에 자란 유일무이한 열매.


그 자체가 가진 향과 락에 이끌려 다가오는 것들을 모조리 선을 표방하는 파수꾼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오감과 정신을 농락하는 맛을 가져, 단 한 번이라도 입에 댄 자는 육신도 영혼도 포로가 되어──

 

 

 

 

에덴(Eden)

Written by VC

 

 

 

 

 

 

 

 

와삭, 싱그러운 소리와 함께 과육이 부서졌다. 하즈키는 입 안에 든 것을 이빨로 짓이기며 다시 한 번 사과를 깨물었다. 와삭.


하즈키가 기대어 선 나무 뒤로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신목이 수호하는 곳이라 하던가.


눈 앞에서 아마노 코우이치와 토우야 카즈오미는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 뒤로 기립한 아라키와 쿠로오의 약해빠진 녀석들.


딱히 끼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이렇게 서로가 교류하는 자리에서 방치되면 반발심과 더불어 묘한 불안이 생긴다. 가슴 한 켠을 옥죄는, 동시에 신경을 자극해 미간을 찌푸리게 만드는 감정.

 

 


거슬려.

 

 


이 세상에 단 셋 뿐인 권속. 그런데도 어째서 코우이치는 토우야만을 편애하는가.


다소 어린아이 같은 의문을, 하즈키는 항상 품고 있었다.


하즈키가 [아마노]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알을 깨고 나온 새끼가 맹목적으로 좇는 것은 최초의 각인. 그 존재를 안 순간부터, 카미오의 전 가주가 [렌]의 산제물이 되어 목만 남기고 돌아온 그 날부터, 어쩌면 [아마노]는 하즈키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반려이자 마지막 보루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 혈족의 남자 전체가 산제물이 될 수 있다는 리스크를 제외한다면 카미오는 꽤나 풍요롭게 살아가는 일족이었다. 행복이 있었다고 한다면 손에 꼽을 수 있는 그 어린 시절, 엄하지만 자상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그리고 형과 함께 한 기억들 속에서 어린 하즈키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부족함 없는 생활, 화목한 가정. 머리 조아릴 일 없는 고귀한 가문.


찰나처럼 스쳐지나간 환상 속의 그림은 언제나 같은 풍경으로 끝이 난다. 흩날리는 벚꽃, 어둠 속에 빛을 내뿜으며 열리는 문, 사라지는 아버지의 등 그리고─── 머리만 남은 핏덩어리.


알은 깨질 수 밖에 없다. 영원한 낙원 따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뇌리에 각인된 그 붉은 그림을 가지고 성장해가며 수도 없이 탈선을 거듭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카미오는 혈족이었고 하즈키는 선대 가주의 아들로서 가장 유력한 차기 당주였다. 만날 때마다 아니꼽다는 듯 쳐다보는 일족의 노친네들도, 잔심부름도 성질도 묵묵히 받아주는 시녀--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즈키는 카미오. 몸 속에 흐르는 피로 얽힌, 의지 따위는 억눌러버리는 현실. 그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선택지는 그것 뿐이었기에.


그리고 저에게 주어진 운명을 견디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 그것이 바로 하즈키의 신루기, 아마노였다.


지금에 와서는 그 [아마노]가 더는 아마노가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사실 하즈키 자신도 생각할 수록 우습기만 했다. 동생에 대한 집착이 형으로 옮겨간 꼴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지만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피보다도 오래된 전생의 인연. 변질되어 버린 몸과 정신이 만족하는 유일무일한 먹이이자, 원천이자, 각인.


깨져버린 알 속에서 속만을 들여다보려던 새의 모든 것을 사로잡은 것은, 최초의 각인.


그러나 하즈키에게 있어 최초이자 최후인 각인은, 그 역을 성립시키지 못한다. 아마노 코우이치에게 있어 하즈키의 존재는 토우야와 비등하거나── 혹은, 인정하기 싫지만, 낮거나.


아마노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는 사실 자체에만 집중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피에 얽매여 과거를 두려워하며 [렌]의 그릇을 찾아헤매던 그때는 이제 아득히 멀다. 남은 것은 바로 앞에 놓인 두 개의 인연. 둘도 없는 관계. 그리고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스스로의 자존심마저 짓밟을 각오. 코우이치를 먹기 위해, 토우야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


이따금 아마노와 토우야는 제 안의 신령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각각 루쉐와 미스라라고 불리는, 최상과 최강의 기의 원천. 그러나 하즈키는 제 안에 있을, 적어도 동등한 권속인 둘에게 공인받은 타루파와 말이 통해본 적 따위 없었다. 애당초 [렌]이 아닌 타루파에게 의사소통을 허용할 만한 의사가 있는지 부터가 의심스러웠다.

 


어째서 말이 없는 거냐, 너는?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 처량한 일이나, 그럼에도 중얼거리게 되는 건 역시 불안하기 때문이라.


혼을 먹는 아샤라, 귀신이 되어버린 몸뚱아리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 세상에 홀로 남을 수 밖에 없다는 고독. 조금만 파고들어도 흔들리는 정체성에 대한 위기감이 답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을 부추겼다.


[최강의 자]와 동등해지기 위해 스스로가 바뀌어야 한다고 직시했지만, 여전히 하즈키는 나약했다. 아무리 부정하려 들어도 진실은 진실. 하즈키는 새로이 알게 되는 사실 하나 하나에 흔들렸다. 쉽게 요동쳤다.


그런 불안정함을 다독여주는 손길이 바로 앞에 있었다. 불현듯 하즈키는 갈증을 느꼈다. 사실 언제나 느끼고 있지만 현실적인 제약으로 눌러온 것을, 새삼 자각하자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왔다. 타들어가는 목, 열기에 누르익은 심장. 현세의 대용품 따위로는 대신이라도 해소할 수 없는 욕구.

 


어이, 코우이치.

 


앞에 선 [최상]의 이름을 부른다. 마지막으로 와삭, 씹은 사과의 달달한 과즙이 시원하기는 커녕 미적지근하게 혀 끝에 달라붙었다.

 


먹게 해달라고.

 


앙상한 중심부만 남은 사과를 땅에 던져버리고,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인식하며 하즈키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수선한 주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눈이 부실 정도로 뜨거운 열기─ 손에 쥐어도 금세 빠져나가버리는 탐스러운 과실을.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는 욕(欲)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저와 비등함에도 한 팔에 끌려오는 육체의 여린 살에.


날카로운 이를 가져다댔다.


아아. 그것은 결국 에덴의 과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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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런 탐미계? 를 좋아합니다. 일본소설은 그닥 취미가 아니지만 그걸 뛰어넘어서 요시하라 리에코나 야마아이 시키코나 하기오 모토(이 사람은 좀 예외지만)... 어려운데 이해가 되는 듯 안되는 듯 읽을수록 절절하게 들러붙는 감정선의 묘사가 매우, 매우, 거기에 육체적인 능욕이 더해지면 말할 것도 없이, 좋아요. 새드와 배드의 중간쯤 되는 오픈엔딩에 고귀한 자의 타락이라던가 신성의 추락, 감미로운 나락, 은근 꼬여있는 관계면 완벽하죠. 말그대로 탐미. 문제가 있다면 탐미계는 그런 문체를 가진 사람이 쓰지 않으면 이 글처럼 ㅇ라너ㄴㄹㅇㄴㄷ... 그렇다는 거.

 

참고로 저는 토우야 파입니다. 토우야라고 쓰니까 BW의 토우야가 자꾸 겹쳐지네요ㅋㅋㅋㅋ 카즈오미라고 해야겠구나... 근데 왜 하즈키 시점이냐 하면 얘가 셋 중 제일 정신연령이 어려서 심리 묘사가 잘 된달까 음()


여튼 그러니까 카다쌤 요시하라쌤 25권 얼른... 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