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플코라/ How you remind me
1일1장씩 쓰는만큼 이어질 무언가의 글타래, 선등록 후퇴고.
코라씨 생존if) 드레스로자의 악명 높은 인형 썰의 연장선. 시계열 아닙니다.
일단 돞코를 표방하고는 있는데 그저 코라손에의 애정(?)을 담아....
제목은 동명의 노래 제목을 임시로 빌렸읍니다.
사랑과 정열의 도시, 드레스로자. 그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왕궁에는 십여 년 전 교체된 왕조의 현 주인이 거주한다. 상층에는 최소한으로 필요한 인원만 올라올 수 있도록 하라는 그의 지시에 따라, 매일 청소를 위해 나타나는 아침의 몇몇 시중인들을 제외하면 기나긴 복도는 인적도 없이 조용하다. 그런 고요함을 깨고, 복도 중앙의 한 방에서 커다란 굉음이 울려퍼졌다. 부동의 암반이 조금이나마 흔들린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일까.
“ 이 자식…! 잘도 내 약혼자를! ”
눈물을 그렁 매단 채 소리치는 여인의 이름은 베이비 5. 메이드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바주카포를 손에 들고, 아니, 팔꿈치 아래부터 차가운 쇳덩이로 변형시켜 누군가를 향해 들이밀고 있었다. 범인(凡人)이라면 꼼짝도 하지 못할 만큼 사나운 기세였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 앉은 남자는 떨기는커녕 입가에 길쭉한 미소를 띄우며 한 손에 든 잔을 휘 흔들었다. 붉은 액체가 찰랑 흔들렸다. 당장에라도 포를 쏠 것처럼 달려들던 베이비 5의 몸이 허공에서 멈추더니 쾅,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떠밀리기라도 한 듯 한구석에 처박혔다. 훗훗, 기묘한 리듬으로 웃는 남자의 옆에서 방의 벽이 부서지기 전부터 서있던 트레볼이 몸을 휘적거렸다.
“ 베헤헤— 오늘도 기운차구나, 베이비 5— 몇 번째 약혼자였더라아~? ”
“ 다섯 손가락 넘어가면서부턴 새기도 귀찮더만. 매번 똑같은 반응이니 도피도 고생이 많아. ”
“ 정확히 열두번째야! 벌써 열하나의 마을이 사라졌다구! 으허엉....! ”
“ 왜 마을 하나가 비지? ”
“ 같은 마을 출신이었거든. 원샷투킬이었지. ”
벽에 얼굴을 처박혀 새빨갛게 변한 코를 찡그리며 엉엉 우는 베이비 5에 아랑곳않고 두 거한은 잡담을 이어갔다. 소란하고 기이하게 폭력적인 언제나의 일상이었다. 남자를 죽이겠다고 이를 가는 그녀에게,
“ 다아 도피가 널 걱정해서 그런 거야. 넌 남자 보는 눈이 없으니 말이야. 브에헤헤헤— ”
“ 그것보다 n년산 와인병이 저렇게 깨져버리다니 아깝네양… 베이비, 그만 울고 영보스를 위해 새 병이나 가지고 와. ”
버팔로가 말을 던지자 베이비 5는 언제 분노했었냐는 듯 자신을 필요로 하는 거냐며 눈을 빛냈다.
자신이 부숴놓은 벽의 파편을 한 쪽으로 치운 뒤 와인을 가지러 그녀가 사라지고 버팔로는 슬금 눈치를 보다 밖으로 날아올랐다. 애당초 트레볼과 디아만테는 각각 보고를 위해 잠시 들렸던 것이기에, 두 사람 모두 몇 마디를 더 건네고 제 자리로 되돌아가자 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부서진 벽의 구멍으로 햇빛이 내리쬐는 정오, 한 나라의 주인으로서 몸이 둘이라도 모자랄 남자에게는 드물게도 오후에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그는 와인을 몇 모금 더 홀짝였다.
그때, 그의 무릎 위에 가만히 앉아있던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벽이 부서지고 베이비 5가 요란한 소동을 벌일 때에도 한 치 미동 없던 소년이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리는 것을 남자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잠시 빛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다가 뒤를 돌아보는 소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소년의 ‘표정’이 아닌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자로 닫힌 입가가 귓가에까지 죽 이어지고, 풍성한 양털 같은 머리카락 아래 반쯤 가려진 눈은 유기체의 그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하게 반들거렸다. 긴팔 셔츠와 반바지 아래 간당하게 가려진 관절은 가만히 서있으면 어린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잘 맞물려 있지만, 움직일 때마다 빈 공간을 보이며 삐걱거리는 듯했다. 소년, 아니 그것은, 빛을 등져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도 형형한 붉은 눈동자로 잠시 남자를 올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렸다.
“ 아아, 그래. 벌써 시간이로군. 잘 다녀와라. ”
남자는 가볍게 고갯짓했다. 그것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의 옆을 스쳐 방을 나섰다. 비로소 혼자 남은 남자, 도플라밍고는 잔을 옆에 내려놓고 다리를 꼬았다. 오랜만에 오수라도 즐겨볼까, 선글라스 속 가려진 두 눈이 감겼다.
언제나 빛과 웃음이 넘치는 이곳의 주민은 인간만이 아니다. 그네들이 기르는 동식물을 차치하고,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장난감 역시 사람들처럼 멀쩡하게 살아 움직이며 그들과 공존하고 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인간을 돕는 장난감들은 비록 외양은 달라도 마음만은 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이좋은 국민들, 살기 좋은 도시.
그러나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오면 도시의 열기는 절반으로 줄어든다. 인구에 비하면 극히 일부인 장난감들이 밤에 정해진 구역을 빠져나오면 안 된다는 법에 따라 모습을 감추고 나면 비로소 인간들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일거리도 문화 활동도 잠시 접고 집에 들어가 가족만의 모임을 갖거나 약속을 잡고 별도의 장소에 들어가거나. 밤의 거리는 낮에 비하면 무척이나 한산해진다.
슬슬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는 오후의 시간. 장난감들이 맡은 일을 정리하느라 부산한 이때, 드레스로자 남쪽에 위치한 세비오의 소광장에선 한바탕 먼지바람이 일었다. 작은 소동의 중심에는 여자 둘이 있었다. 쟁쟁하게 울리는 그녀들의 고함소리를 들어보면, 네가 그이를 꼬셔냈다느니, 나는 그런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느니 하는, 대부분의 모양새와는 조금 다르지만 모두가 짐작하듯 결국엔 치정싸움의 일부였으므로 대부분은 잠시 구경하다 신경을 끄고 제 할 일로 돌아갔다.
점차 높아지던 언성이 뚝 끊긴 것은, 그녀들이 갑작스레 화해를 해서도, 누구 하나가 찔려 쓰러져서도 아니었다. 그녀들을 포함해 주위 구경꾼들의 시선이 모두 한 곳을 향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금발의 소년으로 착각할 만한 인형 하나가 가만히 소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슬슬 몸을 피하고 싸움의 당사자들도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불편한 기색으로 서로를 등진 채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웅성거리던 거리의 중심부가 금세 텅 비어버렸다.
인형은 터벅터벅 거리를 걸었다. 뒤따라오는 시선이 공포와 혐오로 얼룩진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말도 행동도 내비치지 않고, 그저 걷는 것만이 자신의 의무라는 듯 계속 걸어 광장을 벗어났다.
가게 주인이 재수 없는 것을 봤다며 문 밖으로 소금을 휘 뿌리는 모습에, 벽에 기대어 소동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관광객 하나가 의아함을 내보였다.
“ 무슨 일이 있던 거요? 왜 다들 갑자기 조용해져선 자리를 피하나. ”
“ 말도 마쇼. 저 흉물은 입에 담기도 싫수다. 정 궁금하면 저 뒤쪽 수다쟁이 영감들에게나 물어보시게. 난 오늘 장사를 일찍 접어야겠어. 영 찝찝해서 원. ”
당신이 마시는 게 마지막이오, 라고 말하며 주인이 앞치마를 벗었다. 관광객 남자의 호기심이 한층 불타오른 것은 물론이다. 잔을 계산하고 주인이 가리켰던 방향으로 몸을 튼 남자가 뭔지 모를 주제에 한창 수군거리던 노인의 무리에 넉살좋게 끼어들었다. 마침 앞쪽에 작은 주스 가게가 열려있어 가장 싼 주스 석 잔을 사서 돌리자 노인들은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 그 인형은 이곳에선 아주 악명이 높다네. 자네는 외지인이지? 이 나라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들어도 봤을 게야, 드레스로자의 ‘처리자’에 대해서. ”
“ 처리자…? ”
“ 매드돌Mad doll이라고도 하고, 붉은 처형자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로 불리지만 다들 쉬쉬하고 있지. 일단은 왕궁 소속이니까 말이야. ”
“ 겉보기엔 그냥 작은 어린아이 같았는데요? 멀리서 보니까, 다른 인형들보다 훨씬 사람처럼 생겼고. ”
“ 어허, 이러니 외지인들은 멋모른다니까… 자네, 얼마 전 일어났던 왕국습격사건은 알고 있나? ”
“ 예에, 그거야 당연히 알죠. 입국하자마자 항구서부터 아주 호외로 떠들썩하던걸요. ”
“ 현 국왕님이 아무래도 전현직 해적이시다보니 국왕으로서 자격이 없다 모다 감히 떠들어대는 치들이 있었어. 개중 극단적인 놈들이 왕궁을 습격한 거야. 축제가 한창이었을 때라 지키는 경비도 허술했고 국왕 휘하의 간부들도 밖으로 나와 열기를 즐기고 있었지. 이건 왕궁 외벽 수비대인 내 사촌의 친구에게서 들은 건데, 아무튼 뭔가 일을 치기에는 나름 주도면밀했나봐. 성문 밖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그나마 남은 인원이 그리로 몰려간 틈을 타 2층에까지 올라갔는데… 거기서 딱 마주치고 만 거야, 처리자를. ”
“ 전투인형… 인가보지요? ”
“ 뭐야, 그런 분류도 알고 있나? ”
“ 왜, 로봇대장 같은 거 아닙니까. 어릴 적에 상상하곤 했었죠. ”
“ 이 나라는 그쪽 기술은 영 들어오지 않아서 말이지. 여튼 전투의 의미로 말한 거라면 반은 틀렸다네. 그건 대등한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었거든. 홀 가운데 늘어진 시체들은 하나같이 잘게 찢겨져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지? 피가 온 사방에 튀겨서 청소하는 데 애먹었을 거야. 물론 이것도, 그 광경을 가장 먼저 목격한 우리 사촌의 친구의 친구한테서 들은 얘기지만. ”
“ 피비린내 나는 사건에는 꼭 존재가 거론되는데다 떠도는 소문들만 해도 무시무시해. 우리 며늘아기는 손주 녀석 겁 줄 때에 말 안 들으면 매드돌이 잡으러 온다고 하더라고. ”
“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지만, 같은 장난감들 사이에서는 더 끔찍하다는구만. 공식적으로 ‘장난감 처리자’의 위치에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것이 저지른 살인은 모두 왕실에 대항한 반역자나 국법을 어긴 사형자뿐인데 장난감에게는 그런 척도마저 없다는 거야. ”
“ 장난감들에게도 이곳의 법이 적용되지 않습니까? 사람으로 치면 살인자나 마찬가지인데요. ”
“ 뭐… 아무래도 인간과 장난감은 다르잖수. 아무리 같이 웃고 떠들어도, 봐, 하루의 절반은 모습을 볼 수도 없어. ”
“ 그러고 보니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도 들었습니다. 장난감의 집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만약 들어갔다가 걸리면 대죄가 됩니까? ”
“ 예끼, 이 사람아. 말이라도 그런 소리 말게. 국법을 우습게 보았다가 크게 데여. 호기심에 앞날 망칠 일 저지르지 말게나. ”
센고쿠 씨.
언제까지 버텨야 합니까? 얼마나 더 이 지옥에서, 저는 살아가야 합니까?
자유라는 이름으로 내버려두어도 제 눈에는 보이지 않을 실이 보입니다. 무엇보다 가늘고 단단한 실이 제 목을, 팔을, 다리를 옥죄고 놓아주지 않아요. 저는 매일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듣습니다. 이 나라의 어둠에 깔린 비명과 신음소리가, 채찍질 당하는 노예와도 같은 존재들이, 목숨을 구걸하는 비참한 무법자들이, 계속해서 저를 붙잡습니다. 너로 인해 이렇게 된 것이라고, 네가 막지 못한 결과물이 이것이라고. 환영처럼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눈을 감으려 해도 무기질의 눈은 습관처럼 깜빡일 뿐…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몸이 되어버린 이후, 매일같이 생각합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살아갈까.
어째서 그는 저를 이렇게까지 살려둘까요. 그저 손짓 한 번이면 끝날 목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부러 총을 선택한 건, 분명 부친을 살해할 당시 그대로의 논리였겠지요. 죽음으로서 저의 배신을 처단하는 것. 그러나 천운이 무엇인지 저는 살아남았고… 살아남았지만, 살아있는 형국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장난감의 몸에 스며든 핏자국이 아무리 물을 뒤집어써도 사라지지 않을 때의 기분이란 정말 끔찍했습니다. 아직까지 붉은 기운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몸서리치지도 못하는 저를 보며 웃었습니다. 정말로 즐거운 것처럼. 아아, 역시 저는 그를 인간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존재가 당신과 같은 영장물일 리가 없어요.
어제는 오늘로, 오늘은 내일로 끝나지 않는 물레 속에 저는 굴러가고 있습니다. 강압적으로 굴러가는 바퀴가 멈추지 않아요. 그의 손바닥 위에서 그가 바라는 대로 누군가를 해하고, 해체하고, 감히 발을 디딜 수 없는 장소에 얼굴을 내밀어야 합니다. 저를 원망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을 마주하며 웃어보이라는 그의 주문에 따라 저는 또 웃습니다. 경멸과 공포는 한층 짙어지지만 저는 그런 이들에게 사과의 한 마디, 도움의 한 마디 건넬 수 없습니다. 누구와도 단절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을 지우고 숨겼을 때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계약이라고 칭한 그 간단한 말 몇 마디가 저를 제약하고, 모든 길을 막아, 심지어는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조차 없습니다. 분노도 당혹도. 발버둥을 쳐도, 포기하지 말자 스스로에게 되뇌이지만… 날이 갈수록 흐려지는 감정은 아무리 되짚어도 익숙해져만 갑니다. 자극이, 기포제가, 원천이 되질 않아요. 점점 무뎌져갑니다.
아아, 그래요. 무뎌지고 있습니다. 작금의 상황에. 감정에. 저에게로 향하는 감정의 무게에.
제게 있어 남은 희망은 단 둘뿐입니다. 하나는 해군의 정의를 향한 갈망. 당신이 지향하는 정의로운 세계에 있어 이 나라의 비극을 뒤에서 조종하는 그는 없어져 마땅할 존재입니다. 그건 저의 죽음 이후에도 변치 않는 사실이니 당신이, 어떻게든 이곳의 진실을 알게 되면 해군이 나서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입니다.
그리도 또 하나, 지금까지 비어 있는 하트의 자리. 몇 달 전 열린 간부회의에서 우연히 튀어나온 화제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 미니온 섬에서의 그 날 이후로도 잡히지 않고 아직까지 정확한 행방을 알 수가 없다고. 분명 도피는 새로운 코라손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가 바라는 것처럼, 그의 수족들처럼 그를 뒷받침하기를.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아이는 자유롭게 그 아이만의 삶을 살아야 하니까요. 행여 그 아이가 이곳에 나타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세계의 어딘가에서, 푸른 하늘 아래, 바다 위에서 살아가준다면. 제가 아직 그 아이가 살고 있는 세상에 살아있다는 생각이, 막히는 숨통을 조금이나마 틔워줍니다. 희망이 남아있는 한 저는 정신을 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다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매일같이 스스로에게 물으면서도, 고개를 저으면서도, 마지막을 한 줄기 희망으로 끝내야만, 저는.
버틸 수가.
때때로 그는 나를 제 무릎 위에 앉히고 혼잣말한다. 주위에는 다른 대화 상대가 없으므로, 누군가에게 던지는 듯한 어투도 그저 독백에 불과하다. 화제가 현재 진행하는 사업이라던가 세계정부에 대한 소식이라면 기꺼이 작은 정보를 받아들였을 테지만 대부분, 과거의 이야기다.
그는 나를 로시라고 부른다. 그건 내가 어린 시절의 모습을 빼어닮은 인형의 모습이기 때문일까. 그는 나를 동생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 슈가의 능력으로 장난감이 되어버린 나는 더는 그의 기억 속에 없다. 정확히는 ‘코라손’이었던, 패밀리에 들어온 이후의 성장한 나는, 말이다.
그는 마치 내가 자신을 배신한 코라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말한다. 장난감이 되기 전 밖으로 도망쳐 나가고자 하는 나를 바라보던 시선은 사라지고, 더없이 약하고 울보인 어린 동생을 바라보듯 고요하고 자상한 눈으로 내려본다. 처음엔 어찌된 영문이지 몰랐다. 동시에 이것이 기회일 수도 있겠다 생각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기회. 하지만 그런 생각을 비웃듯 내 몸은 나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기실 그가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는지부터가 의문이다. ‘로시’라는 명칭은 동생으로서의 것. 그의 기억에서 사라진 내가 ‘코라손’이라면, ‘로시난테’인 나는? 엉엉 울면서 형의 뒤에 숨어 옷자락을 꼭 쥐던 어린 동생이 그의 속에 남아있는 ‘나’라면, 어째서 내 손을 더럽히게 만드는가. 동생으로서의 애칭과 함께 내려오는 건 저 쓰레기들의 수급을 가져와라, 다리를 부러뜨려라, 피비린내 나는 명령들. 패밀리의 일원으로서? 유독 내게만 ‘선한 군주의 패밀리’라는 가림막이 배제되어 있음을 안다. 악명을 한 곳으로 쏟아붓는 것처럼. 마치, 이것이 나를 괴롭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시험하는 것처럼.
어쩌면 그는 망각을 가장하며 나를 기만하는 것이 아닐까.
어린 날의 기억. 아직 모친과 부친이 살아있고, 성지에서의 즐거웠던 추억담이라고 할 것들을 읊조린다. 누군가 듣기를 바라는지 대답이 돌아오기를 바라는지,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과거의 상념으로 빠져들게 된다. 웃음이 있고 평화롭던 그 시절이 곧장 닿을 듯 아른거려 대부분 굳게 닫혀 있던 입을 달싹거린다. 반응을 보여선 안 된다, 알고 있어도 어쩔 수가 없다. 이제는 어디 하나 손을 뻗을 곳이 없는 내게 있어 유일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가 어떤 존재인가 알고 있음에도, 은연중에 스스로의 시야를 가려버린다. 나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에게 기대기라도 하듯.
그나마 고요한 이 시각, 그의 앞에서조차 침묵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명령이 내려지지 않는 이상 목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반응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의 내게 있어 가능한 유일한 저항.
귓가에 나지막히 내려앉던 목소리가 끊겼다. 눈동자만 데굴 굴려 올려보자 커다란 손이 시야를 덮었다. 채 반응하기도 전에 눈을 반쯤 가린 앞머리 끄트머리를 손바닥이 스륵 훑었다. 인간의 그것보다 굵고 보드라운 털실이 떨어지는 손을 따라 올라갔다 떨어졌다. 보는 것만으로 간지러움을 느낄 조심스러운 행동이 낯설지가 않아 불편했고, 내색할 수가 없어 더 불편했다. 때를 가리지 않는 그의 혼잣말은 대게 이런 식으로 끝이 났다.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끈이 하루하루 닳아 없어진다.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나는 그저 얼마나 더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가늠할 뿐이다. 부디, 모조리 삭아 스러지기 전에 버려지기를. 차라리 저 지하에 있는 ‘고장난’ 장난감의 무덤으로 떨어지기를 소망한다. 그곳에서라면 그래도 조금은 길게, 눈을 감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오늘도 북적하군…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녀석들이 사고를 일으키지 않으면 좋으련만. ”
외다리 병정은 콜로세움을 둘러싼 철장 안쪽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정열이 넘쳐나는 이 나라에서도 가장 시끄럽고 기운이 넘쳐나는 장소를 꼽으라면 바로 이곳,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와 투기가 벌어지는 콜로세움일 것이다. 몇 십 분 후 열릴 오늘의 경기에 챔피언이 참관한다는 소식에 평소의 배는 되는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입구로 이어지는 거리 자체가 북적거렸다. 콜로세움 외벽 뒤쪽에는 입장권을 제때 구하지 못한 먹잇감을 낚으려는 암표 상인이나 안쪽에서 경기 배율 정보를 물어나르는 똘마니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런 담이 작은 하이에나들이야 ‘국왕’이 수호하는 양지로 나오는 일이 드물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무방한데, 가끔 겁을 상실했거나 이곳의 규칙을 모르는 녀석들이 양지에서 말썽을 부리는 일이 있다. 외다리 병정에게 이곳의 규칙 따위 현상수배범의 몸을 대놓고 숨길 수 있다는 것 이외에 그다지 큰 의미가 없지만, 그럼에도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가 이 주변에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어린 소녀, 레베카.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고 동시에 애처로운 아이였다. 병정이 경찰에게 쫓기며 더는 이전처럼 하루의 절반을 함께 할 수 없게 되자 그 자취를 애타게 따라오는 소녀를 타인의 시선 탓에 차갑게 내치기도 수어 차례. 콜로세움 내에서만큼은 범법자에 대한 규율이 통하지 않기에 병정은 추적이 심할 때면 콜로세움에 들어와 몸을 숨겼고,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레베카는 어린아이가 돌아다니기엔 위험한 거리에 몇 번씩 나타나 병정을 찾았다. 작은 품에 커다란 종이봉투가 들려있는 건 아마 내일까지 먹을 식료품이겠지. 제 딴엔 모습을 숨긴답시고 머리를 묶어 빵모자 속에 집어넣었는데, 당연히 병정의 눈은 물론이고 어디에서 그녀를 노리고 있을지 모르는 인신매매꾼의 눈도 속이기 힘들어 보였다.
때문에 병정은 콜로세움 안쪽, 레베카의 시선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혹시라도 마주하면 미련이 끈덕지게 붙을까봐, 걱정 어린 눈빛에는 레베카에게 수상한 사람이 가까이 가기라도 하거든 당장 달려나갈 각오를 다지고서.
레베카의 행동 반경 내의 자잘한 움직임에까지 주의를 기울이던 병정의 눈에 한 남자가 그녀의 옆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대낮부터 취한 것인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비틀거리던 그는 염려대로 작은 소녀의 몸을 밀치며 자빠졌고, 뒤늦게 기척을 알아차리고 피하려고 했지만 어설프게 몸이 뒤틀린 그녀 역시 앞으로 넘어졌다. 금방 고개를 들긴 했지만 흙먼지로 더러워진 얼굴에 작은 생채기가 났다. 레베카는 일단 몸을 일으켜, 제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자빠진 남자에게 사과를 했다. 쓸데없는 마찰은 일으키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식료품들을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통조림과 바게트, 껍질이 얇은 파프리카. 봉투 제일 윗부분에 올려져있어 가장 멀리까지 굴러가버린 토마토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앞에, 붉은 구체가 내밀어졌다.
“ 아, 감사합니다… ”
레베카가 친절을 베풀어 준 상대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병정은 철장 밖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다리가 하나뿐인데도 웬만한 사람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와 레베카의 앞을 막아섰다.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굳어있는 그녀를 한 손으로 등 뒤에 숨기며 다각거리던 입을 닫았다. 무언의 살기에 아직까지 널브러져 있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지만 그는 안중에 없었다. 긴 들숨과 날숨을 몇 번 반복하는 동안 대치하던 두 장난감 사이에서 먼저 시선을 거둔 쪽은 상대였다. 한 걸음 물러난 상대는 손에 든 토마토를 한 번, 어떤 이유로든 물러난 걸음을 되돌리면 손을 올릴 기세인 병정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느낀 병정이 뒤로 손짓하자 레베카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발치의 남은 것들을 봉투에 집어넣었다. 돼, 됐어요,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병정은 몸을 돌려 그녀를 안아들고 땅을 박찼다.
레베카는 공중에 떠 목을 웅크렸다. 이대로 인적이 없는 곳으로 향하면 한바탕 혼이 날 게 분명했다. 벌써부터 걱정이 듦과 동시에, 오랜만에 안기는 병정의 서늘한 품이 좋아 슬그머니 뺨을 양철 얼굴에 비볐다. 익숙한 아늑함을 느끼자 조금 전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말로만 듣던 인형을 그렇게나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금색 털실로 반쯤 가려진 눈동자는 제가 산 토마토처럼 새빨간 빛이었다. 그것을 지칭하는 명칭에 ‘붉은’이 들어가는 건 눈 때문인가봐, 무심코 생각해버렸을 정도로. 병정의 경계로 더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어쩐지 그 빛이 선명해, 레베카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덩그러니 남겨진 인형은 멀어져가는 병정의 검은 모자에서 고개를 돌렸다. 제 손에 들린 굵은 토마토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기도 잠시, 그저 서있는 것만으로 늘어나는 웅성거림에 일단 걸음을 옮겼다.
외다리 병정은 익히 알고 있는 장난감이다. 현상금이 걸려 수배되기 전, 그가 처음 ‘나타난’ 순간에 자신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불현듯 나타나 국왕을 업고 달아난 그에 대한 이전 기억은 공백이었다. 이 나라에 존재하는 움직이는 장난감이라면 분명 슈가의 능력에 의해 모습이 변한 사람일 터였다.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몰라도 곧바로 뒤쫓은 이들이 빈손으로 돌아온 점과 우연히 보게 된 사람보다 뛰어난 몸놀림으로 보건대 병사 중 하나였겠거니 짐작하고 있었다.
당시 리쿠 왕을 잡지 못했다는 말에 혀를 차던 도플라밍고는 금세 화제를 전환하여, 전 왕실의 법과 규칙을 패밀리의 것에 맞추어 변형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제대로 수배령을 내릴까 고민한 시간을 짧았다. 깨진 창문 밖을 내다보는 자신을 불러, “ 로시, 그 병정에 대해서는 네가 맡도록 해라. 국왕이 있는 곳을 알아내… 상황을 봐서 제거하는 것도 좋지만 여의치 않거든 끌고 와. 카드는 하나라도 손에 쥐고 있는 게 낫겠지. ” 아마 그는 왕녀를 ‘평화롭게’ 제어할 수단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왕녀 바이올렛의 평소 기백으로 볼 때 아비의 목숨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자신에게는 평상의 임무가 하나 주어졌고, 정해진 시간과 조건이 아니면 왕궁을 벗어날 수 없어 발견하기는 커녕 관련된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잊어갈 무렵.
여느 때처럼 순회하던 북쪽마을의 한 거리에서 현상금 사냥꾼에게 쫓기는 병정을 발견했다. 십수 명의 헌터들이 달려들었는데도 병정은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쏙쏙 몸을 내뺐고, 달리며 주운 나무 막대기로 다가오는 손길을 쳐내어 쓰러뜨렸다. 마지막엔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에 숨어 그들을 피하고 사위가 조용해지자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고 과연 능숙하군, 생각하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기에 놀람도 잠시 금세 경계 모드로 돌입하는 병정에게, 들고 있던 종이에 글씨를 써 내밀었다. ‘국왕 어디’ 그것으로 눈앞의 인형을 누가 보냈는지 알아차린 병정은 바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부러 뒤를 쫓지는 않았다. 병정 자체에 대한 처리는 자율적인 판단, 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병정과 조금 전의 소녀가 어떤 관계인지는 몰라도 혼자 저를 마주했을 때만큼 날카로운 태세로 보아 가까운 사이임이 분명했다. 장난감과 인간, 친구인 걸까. 보는 눈이 많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날아올 정도로 소중한 존재라면 그 소녀도 국왕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을까…
지난 일을 비롯해 여러 가지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왕궁 현관에까지 도착해 있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이라 교대 직전인 문지기가 저와 눈이 마주치고 황급히 차렷 하듯 몸을 바로 폈다. 그렇게 겁내지 않아도 아무 짓도 하지 않는데.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을 삼키고 계단을 올랐다. 긴 나선의 계단을 돌고 돌아 2층으로, 언제나의 방으로. 매끄러운 문을 지나 바로 보이는 소파에는 커다란 인영이 앉아 있었다. 고개를 젖힌 채 미동이 없어 드물게 잠들어 있나 싶었다. 옆자리로 기어 올라가자마자 팔짱을 끼고 있던 손끝이 살짝 움직임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 …그건? ”
조금 잠긴 목소리가 물어와, 그제야 아직까지 들고 있던 토마토를 의식했다.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병정에 대한 것까지 털어놓아야 할 판이라 그저 ‘주웠어’ 적어 보였다. 굳이 캐물을 것도 아니라 생각했는지 그래, 간단하게 넘기고 말이 없었다. 귀를 기울이면 고른 숨소리가 들려, 역시 자고 있었나.
몇몇을 제외하고는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방 안은 조용했으나 방을 떠나기 전 베이비가 부쉈던 벽의 구멍으로 작은 소음이 들어왔다. 정열적인 멜로디나 암석에 바람이 부딪히는 소리 같은,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배경으로 삼아 흘러넘길 자잘한 소리는 누군가에겐 무척 큰 소음이나 다름없었다. 잠자리에 예민해 숨소리가 시끄럽다며 함께 밤을 보낸 여인도 내쫓는 남자였다. 그리고, 비록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지만, 인형은 그 예민함이 정착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남의 땅과 타인의 소유물 뒤에 몸을 숨기고 눈치를 보며 살아남아야 했던 그때, 제 옷자락을 붙잡고 뒤만 따라오는 동생을 재우고도 눈을 붙이지 못하던 그 시절. 붙잡은 손은 얼마나의 절박함을 담고 있던가. 당겨진 기억에 손에 쥔 토마토를 가만히 굴려보다가, 입을 뻐끔거렸다. ‘사일런트’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방음벽 안으로는 그 어떤 소리도 침입하지 못한다. 수면이 필요 없는 장난감의 몸으로 더는 누구보다 평온한 잠은 즐길 수가 없지만.
고요하고 가라앉아 이 작은 벽에 둘러싸인 순간만은 오롯하게 자신의 통제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잘 자고 일어난 와카가 토마토를 냠냠하셨다는 이야기.
어릴 적부터 로시난테는 덤벙거리는 아이였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넘어지고 뜨거운 것을 알면서도 무심코 들이켜 입천장을 홀랑 데이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죽은 줄 알았던 불씨가 옷에 옮겨붙는다거나 위험하니 접근 금지라고 주의받은 물건을 건드려버리는 등 일상생활이 가능한지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공적인 자리나 업무 중에 실수로 이어지지 않아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지만.
아무튼 그의 덜렁거림은 장난감이 된 이후에도 나아진 바 없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구도 콰당 넘어진 그를 비웃거나 손을 내밀지 않는다는 사실 뿐이었다. 아, 이건 ‘코라손’일 때와 같나. 하지만 쏟아지는 눈총은 그 온도가 달랐다. 온정도 웃음도 없다. 그저 두려움의 연장선이었다. 여전히 그를 킬킬 비웃는 사람이 있다면 패밀리의 간부와 도플라밍고 정도였다. 그나마도 전자는 무시하기 일쑤였다.
따라서 콰당, 익숙한 복도에서 큰 소리로 넘어진 건 결코 의도해서가 아니었다. 하필 바닥에 청소를 위한 왁스가 잔뜩 발라져 있을 줄은. 거하게 구르다 대자로 뻗은 인형의 얼굴에 흠뻑 젖은 대걸레를 문댄 시녀가 당황하며 치웠지만 이미 뒤통수에는 반들거리는 왁스가, 얼굴에는 물로 흥건해진 뒤였다. 마침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던 글라디우스가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보았다. 그는 겁에 질려 사과를 반복하는 시녀를 물리고 멀뚱히 천장만 응시하는 인형을 지났다. 애당초 그는 보스가 곁에 두는 장난감에게 무관심한 간부 중 하나였다. 문소리가 작게 들리고 기척이 사라지자 인형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파르르 털고 남은 물기를 손으로 대충 훑었다. 왁스는 털어봐야 비눗기처럼 남았지만 아무렴, 겉보기에만 멀쩡하면 되었다. 대걸레를 붙잡고 기둥 뒤에 숨어 어쩔 줄 모르는 시녀를 위해서라도 자리를 피하는 게 나았다. 걸음을 옮겨 글라디우스가 들어간 방으로 향했다.
“ 그러고 보니 잊었었군. 그새를 못 견디고 덜렁인 거냐, 로시. ”
서류를 들고 한 장씩 넘기면서 도플라밍고가 혀를 찼다. 물은 털어냈는데 옷이 더러워졌나 싶어 제 몸을 살펴보는데 글라디우스가 제 옆통수를 톡톡 치는 시늉을 했다. 그것을 보고 손을 올리자 회색 실타래가 하나 떨어져 나왔다. 조금 전의 대걸레에서 떨어진 모양이다. 혹시 남은 것이 있는지 몰라 머리를 한바탕 손으로 휘젓고 더 묻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소파로 다가갔다. 서류에 적힌 항목에 대해 글라디우스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플라밍고가 손을 뻗었다. 긴 손가락이 코앞까지 내려와 왼쪽 눈가를 쓸자 옅은 물기가 닦였다. “ 앗, 보스, 손수건을. ” 글라디우스가 주머니를 뒤적이는 것을 괜찮다고 가볍게 말하며 이번에는 낮은 콧대를 지나 맞물린 입가를 닦은 뒤 엄지로 물기 묻은 검지를 슥슥 문질렀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서류로 고개를 돌려, 집중. 못마땅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던 글라디우스도 원 주제로 돌아갔다.
되돌아간 옆모습을 보았다. 굵은 선과 불거진 목젖, 선글라스 사이로 살짝 보이는 속눈썹 따위를. 사소한 데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것에도 익숙해진 지 오래다. 그런데도 여전히 멋쩍은 기분이 생소해 소파 밖으로 다리를 꼼지락거리다가,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이런 모습이 되어버린 지 2년하고도 반…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두 번의 신년맞이 행사가 지나고 계절이 기억하던 것과는 정반대로 바뀌어버렸으니 아마 그 정도 되지 않을까. 도피는 정보를 숨기지 않았다. 나를 옆자리에 앉히고 간부회의를 진행하기 다반사였고 간부들도 굳이 말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알음알음 주워듣는 정보는 모두 패밀리의 사업 현황이나 무슨 연구의 진행에 대한 보고였지, 내가 바라는 해군의 전력이나 세계정부의 소식 등은 없었다. 제 의사와 무관하게 정해진 하루의 루트는 대부분 왕궁에 한정되어 있는 데다 단 한 번의 외출은 어디 다른 곳으로 샐 틈 없이 제한된 시간 내로 돌아와야 해, 내게는 정보를 얻을 수단이 없었다. 차라리 코라손일 적에는 나았지, 센고쿠 씨께 보고할 여유가 있었으니. 막힌 입에 제멋대로인 손발은 타인과 최소한의 소통마저 거부했다.
정작 나를 왕궁에 못박아둔 장본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녔다. 그야 국왕의 자리에 있고 해적단의 우두머리이기도 하지만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이 섬에서 저 섬으로 바다를 건너다녔다. 귀가 시간은 불규칙했고 심지어는 ‘바깥 일’ 때문에 국내 행사에 불참하여 디아만테와 같은 간부가 얼굴마담으로 대신 참가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왕궁 2층의 방에까지 국민들이 국왕을 앞에 둔 것처럼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와 씁쓸했더란다.
그런 식으로 도피가 자리를 비운 것도 벌써 열흘째.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하기엔 간부들의 반응이 너무나 여상했다. 물어볼 수도 없고, 물어볼 관계도 아니고. 그들은 보스의 말대로 나를 조금 독특한 패밀리의 일원으로 대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저기 살랑거리며 걸어가는 죠라나 옆방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있을 글라디우스에게 필담으로라도 말을 건다? 스파이더 마일즈에 있을 때에도 거리감이 상당했던 그들이 지금이라고 가깝게 느껴질 리가 없다. 언제나처럼, 훌쩍 나갔던 것처럼 훌쩍 돌아올 누군가를 기다릴 수밖에.
마음만은 이때다 하고 능력을 써 밖으로 빠져나간 지 오래… 도피가 부재할 동안은 한 번의 외출도 불가능했기에 멀뚱히 소파에 앉아있거나 왕궁의 복도를 배회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간부회의 때를 제외하고는 2층에 오는 일이 드문 바이올렛과 마주쳤다. 멈춰서있던 그녀는 나를 힐끔 보더니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고개를 들고 올라가버렸다. 전 왕의 실각과 동시에 패밀리에 강제로 편입된 바이올렛은 능력 때문인지 시선의 방향이 굉장히 다채로웠다. 그녀가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 있던 방향은 거리가 아닌 왕궁 내부였다. 탐색? 아니면 다른 간부진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지, 간부가 껄끄러운 건 나와 그녀의 유일한 공통점이니까.
바이올렛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알게 되는 건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다.
도피가 귀가한 건 그로부터 이틀 뒤, 해가 서서히 가라앉는 저녁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내 옆에 커다란 그림자가 소리 없이 착지했다. 은은한 등불이 비추는 그는 역시나 상처는커녕 피로한 기색도 없었다. 나는 익숙하게 메모지를 들었다. ‘어서와’
“ 아아, 다녀왔다, 로시. 훗훗. 오래 기다리게 했어. ”
정확히는 기다리도록 강제한 것이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는 굉장히 즐거워보였다. ‘무슨 일?’ 또박또박 써서 보이자,
“ 글쎄… 내일 아침에는 정식으로 기사가 뜰 테지만 가족에게는 먼저 말을 해야겠지. ”
잠시 턱을 문지르던 도피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간부 전원을 소집했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몇을 제외하고 모두가 모인 그 자리에서 그가 전한 소식은 놀라웠다. 세계정부에서 칠무해의 자리를 권했으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앞뒤를 잘라먹었다고밖에 들리지 않는 그 말에 누구도 경악하지 않았다. 다들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담담하게, 한편으론 열렬하게 축하를 전하는 가운데 홀로 우두커니 섰다. 미래라는 것을 나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 나라에 정착하고 두 번째로 열리는 세계회의. 무슨 변덕인지 도피는 마리조아행에 나를 동행시켰다. 금제는 드레스로자에서 적용되는 것 그대로였지만, 매일을 소통 없이 쳇바퀴처럼 돌고 돌다보면 아무런 파괴적인 짓을 당하지 않아도 정신이 함몰되기 마련이다. 하루하루 마음을 다잡는 데 심력을 소비하던 나는 미지의 외부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뻤다.
항구에서 도피 특유의 취향이 반영된 분홍 일색의 배에 올라탈 때 도피는 내게 한 가지를 당부했다. “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혼자 내버려두면 미아가 되기 십상이니. ” 지나가듯 가볍게 말해서 그렇지, 그의 말이 장난감인 내게 갖는 무게를 생각할 때 또 하나의 금제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지금의 나는 정보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고, 그나마 있는 신뢰(정확히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마저 증발시키는 만용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그를 올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는 꼬박 일주일 바다 위를 달렸다. 과연 칠무해라는 것일까, 도중에 해적을 세 번 마주쳤지만 모두 조용히 지나갔다. 정확히는 그쪽에서 알아서 피해갔다. 세 번째에 마침 갑판 위에 나와 있던 도피는 꽁지가 빠질 세라 항로를 돌려 멀어져가는 해적선을 보고 여느 때처럼 웃었다. 재미없다는 얼굴이었다. 만약에라도 덤벼왔으면 감히 대항하냐고 짓밟았을 것이면서. 선실에서 도피는 또다시 특정 정보가 배제된 대화를 나누었고, 모험의 길을 역행하여 가는 위대한 항로는 답지 않게 날씨가 좋았다. 습기로 달그락거리는 다리 관절의 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암벽으로 이루어진 왕궁이 아닌 바다의 위에 있구나, 실감했다. 지독하게 막혀있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는지, “ 네 녀석, 그 얼굴이 고정된 게 아니었군. ” 글라디우스가 괴상한 생물을 보듯 말했다. 금방 표정을 되돌렸지만 예나 지금이나 보스에게 맹목적인 그는 이 사소한 발견까지 꼼꼼하게 보고했고, 나는 마리조아에 도착하기까지 도피의 묘한 행동에 시달려야 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차라리 명령을 해, 명령을. 도피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지 않다는 심정만 제외하면 지극히 순조로운 항해였다.
7일이 지나, 배는 해군 본부에 도착했다. 그야 마리조아의 앞에 대문처럼 떡하니 해군 본부가 자리 잡고 있긴 하지만 칠무해로서가 아닌 드레스로자의 국왕으로서 온 것이 아닌가. 근처 적당한 섬에 정박하면 될 것을 굳이 해군의 영역에 배를 댈 필요가 있나, 의문 섞인 눈으로 올려보자, 도피는 일주일간의 권태에서 벗어난 얼굴로 ‘해적이라고 얕잡아 보던 녀석들이 귀빈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따위로 대답을 주었다. 역시 악취미. 땅을 밟는 느낌에 다시 일자의 무표정으로 돌아온 것이 다행이었다.
회의가 열리기까지 이틀. 이쪽을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던 남자가 위로부터 수신을 받고 상층으로 정중하게 안내했다. 오랜만에 보는 흰 복장이 어쩐지 눈부시게 느껴져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황급히 뒤를 따랐다.
능력이란 사용하는 자의 역량에 달린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하잘 것 없는 능력이라도 갈고 닦으면 얼마든지 힘의 상관관계를 뒤집을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 말을 한 주체가 도플라밍고만 아니었다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능력 계발에 정진했을지도 모른다.
실실 열매의 능력은 실을 다루는 것. 고작 초인계에 불과한 능력을 자연계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응용하는 도플라밍고의 재능은 천부적이었다. 실로 타인을 조종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자가 한둘이던가.
그러나 같은 핏줄을 타고 났더라도 그 재능까지 같진 않은 법. 로시난테 역시 악마의 열매 능력자였지만, 도플라밍고와 같이 월등한 재능은 없었다. 열매를 먹은 지 수 년이 지나도록 활용하는 기술은 고작 두셋이 다였다. 또한 그에게는 보다 뛰어난 힘을 갖고자 하는 의지 역시 부재했다. 로시난테의 능력을 알게 된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고 단정 짓기도 했고, 그 자신부터가 굳이 계발하지 않아도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여긴 것도 있었다.
고요고요 열매. 소리를 다룰 수 있는 능력, 이라고는 하지만 로시난테 자신은 주로 소리를 소거시키는 방면으로 사용해왔다. 열매의 이름부터 그렇게 지어진 것을 보면 딱히 잘못된 방향도 아니었다. 로시난테가 고요고요 열매를 먹은 것은 해군에 있을 시절, 능력자 양성 계획에 지원하고 나서였다. 암시장에서 가짜 악마의 열매조차 값비싸게 팔리는 대해적시대, 해군은 정의라는 권력을 앞세워 손에 넣은 악마의 열매로 해군 인력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열매 중에는 도감에 실려 정보가 충분한 것이 있는가 하면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는 미지의 능력도 있었다. 로시난테의 순번으로 돌아온 고요고요 열매는 후자에 속했다. 보급관, 상관, 동기 누구 할 것 없이 능력에 대해 듣고는 기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인상이 더러워 오해를 사긴 해도 사람은 좋은 부하가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침묵하다가 “ 그래도 능력이니 쓸 데가 있겠지. ” 던진 나름의 위로를 아직도 기억한다. 로시난테 자신도 차라리 동물계였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크게 위안은 되지 못했지만.
첫 한 달은 능력을 다루지 못해 애를 먹었다. 능력에 목소리마저 삼켜지는 통에 말로 하면 간단하게 끝날 소식조차 장문의 보고서로 대체하길 수어 차례. 아무리 덤벙거려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제대로 된 몫을 하는 로시난테였기에 주변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겨우 목소리를 되찾고, 자신으로부터 발생하는 소리를 온오프 시킬 수 있게 되었을 때, 상부에서 ‘제안’이 내려왔다. 그것은 계발 프로그램도, 이전 업무의 연장선도 아니었다. 해군의 적, 해적의 근거지로 파고드는 잠입 임무였다. 말이 제안이지 곧바로 실전에 투입하는 작태가 참으로 속이 보였다.
해군에 입대하면서도 ‘돈키호테’라는 성을 고집함에 센고쿠는 우려를 표했다. 전 천룡인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해군이어도 위험하니 성을 숨기라고 몇 번이나 조언했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자신의 핏줄을 부정할 수는 없다며 로시난테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어리고 아무것도 몰랐던 거다. 당시의 로시난테는 자신이 부여한 가치를 지키고자 필사적이었다. 그로 인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인생이 결정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십사 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로시난테를 진짜 피가 섞인 혈육에게로 이끌었다. 상부의 지령에 적힌 패밀리 네임이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져, 그는 오랫동안 침묵에 잠겨있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로시난테의 정신만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허둥댔지 몸은 착실히 지령에 따라 움직였다. 그런 맥락에서, 돈키호테 패밀리가 관리하고 있는 어느 섬에 하선했다가 트러블에 휘말린 것은 결코 로시난테의 의지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덤벙거리는 성향이 노예 포획의 현장에서 발휘되었을 뿐. 훗날 그것이 근처 해군 지부의 묵인 하에 자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당시에는 소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해군의 도움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얌전히 붙잡혔다. 그 결과 생각지도 않은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하필 우연히도 그곳을 지나던 그의 친혈육에게 발견된 것이다. 14년만의 대면이 피와 먼지로 얼룩진 얼굴이라니…
아무튼 우여곡절 패밀리에 들어와 보스의 오른팔 격인 코라손의 지위를 받고난 후에는 하루하루가 얇은 얼음 위에 서있는 나날이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온 신경을 패밀리, 그 중에서도 유독 제게 친근하게 구는 혈육에게 집중시키느라 다른 일에 골몰할 시간이 없었다는 소리다. 오래된 회포를 풀기라도 하듯 도플라밍고는 로시난테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만약 로시난테가 정말 갖은 고생을 하다가 형을 만났다면 그래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해군으로서 패밀리에 잠입한 로시난테는 선글라스 너머서부터 주어지는 호의가 부담스러웠다. 언제 들킬까 조마조마하기도 했고,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게 될까 두려운 탓도 있었다. 로시난테가 자신이 악마의 열매 능력자라는 사실을 새삼 자각한 건 일정 기간에 한 번씩 해군에 보고를 올리기 위해 외진 곳에서 방음벽을 만들어 낼 때, 남의 눈을 피해 스스로에게 캄(clam)을 걸 때 정도였다. 로시난테는 3년을 채 채우지 못하는 기간 동안 자신을 숨기며 살았다. 그 이상으로 능력에 대해 고찰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겠다는 생각 따위는 한 번도 든 적이 없었다.
그건 비단 여유의 문제만이 아니라 로시난테가 능력의 향상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힘을 원해서 악마의 열매를 먹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다룰 방도가 제한되어 있다. 그로부터 조바심을 느끼는 것을, 드물게 시간을 내어가며 센고쿠가 다독여주었다. 이미 먹어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다. 그렇다면 평생을 동반할 능력을 너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 센고쿠는 로시난테를 거두어준 은인이자 능력자로서나 해군으로서나 대선배였다. 그 한 달 동안 로시난테는 고요한 능력을 수긍했다. 몇 가지 간단한 기술을 성공한 것만으로 충분히 기뻐했고, 사용 방향을 정했다. ‘숨는 것’과 ‘숨기는 것’으로 용도가 한정되자 능력의 폭주도 가라앉았다. 그리하여 안주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은 이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틀린 길은 아니었다고, 로시난테는 생각한다. 그때의 그에게는 불안정을 줄이는 것이 최우선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안주함만으론 충분치 않았다. 도플라밍고가 알지 못하는 고요고요 열매의 능력은 모든 수단을 빼앗겨버린 그에게 있어 유일한 카드였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하루를 수 년 반복하노라면 가장 자유로운 것은 생각이었다. 경이로울 정도로 뛰어난 능력의 활용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다가 어으 날 무심코 떠올린 생각. 언제나 덤벙거리는 로시난테가 수 년만 더 일찍 고민했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르는 의문은 가벼운 고찰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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