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9
검마은월
그의 옆은 조용하다. 마치 아무도 없는 듯한 고요함. 기척도 없다. 꼭 이 공간에 혼자 있는 기분이다.
막상 그를 마주하면, 압도된다. 거대하고 밀집된 힘이 오오라처럼 일렁이는 환상이 기저에 깔려있다.
그에게 원망을 가질 처지이긴 하나, 그를 마주대하면 막상 불처럼 격노가 솟구치진 않는다. 사그라든 것일까, 살랑이는 두려움에 그의 곁을 벗어나면 마음은 새어나온다. 이따금 얄팍한 안도감도 든다. 아직 이 세상에 접점이 남아있구나. 마치 그에게 품는 감정이 그와 자신을 잇고, 나아가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는 고리라도 되는 양. 핑계가 되는구나, 그리 여기는 것처럼.
결전의 날 이후 그를 처음 마주한 그 날을 기억한다. 사실 그 날만이 지금에 와서는 내게 생생하다. 요즈음의 기억은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하고 몽롱하기에.
그 날, 고요한 습지에서 뱀처럼 발치를 기어오르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정령을 불러낸 순간, 단순히 어둠의 힘이라 판단했던 그림자가 차곡차곡 쌓이며 형체를 이루었다. 주변이 어그러지고 붉은 빛이 눈 앞에서 폭사했다. 명멸하는 습지의 풍경.
그리고 분명 쓰러졌다 여긴 스스로가 이 다음 순간 서 있던 장소.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습지에서 매끈하게 쭉 뻗은 광석의 바닥으로, 당장에라도 우아한 선율이 흘러나오며 연회가 펼쳐질 것만 같은 홀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살아숨쉬는 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그곳에는 그러나 몇몇 이들이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이쪽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나를 스쳐지나갔다.
장면이 바뀌어, 기이한 기운이 흩어져나오는 문 앞. 기름칠을 잊었는지 삐그덕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역시나 이어지지 않음
검마은월을 써보고는 싶은데 막상 쓸거리를 생각해보면 별로 없다. 흑화는 솔직히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게임 내에서 그런 떡밥이 주어졌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상 캐붕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둘을 붙여놓는다면 은월은 검마님 장난감, 흥미있는 요소(그러나 변수 이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다. 검마님이 불멸의 존재이니만큼 흥미 지속시간도 남들에 비해 월등히 길긴 하겠지만 분명 끝이 올 테고. 물론 '약속'을 했다면 조금 달라지긴 하겠는데. 또 은월에게 검마의 존재는 매우 크지만 그만큼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고. 따라서 검마가 은월을 곁에 둔다면 그건 흥미+악惡수 아닌 변수로써이고, 은월은 있을 장소가 필요해서. 그래서 이 둘을 어떻게 엮어야 은워리를 괴롭혀주고 싶은 마음이 충족된다구요? 근데 얘 멘탈이 유리처럼 보여도 단단해서ㅇ<-<
검마 세력이 나쁜 짓 많이 하고 돌아다닌 것 치곤 검마의 옆자리는 매우 조용하고 큰 일이 없을 것 같다. 원래 최종보스 주변은 소탈한 법. 군단장들도 여간해서는 검마 있는 곳에 다가오지 않고, 오는 놈이라 해봐야 속이 음침한 것들 뿐. 와서도 감히 검마님께 말 못붙이고 보고만 하고 사라지는 정도. 여기에 은월을 넣으면 여러모로 관심의 대상이 되긴 하겠는데. 말하자면 한 공간에서 서로의 존재를 무시한 채 각자 할 일 하는 느낌? 은월은 처음엔 신경쓰다가 나중에는 독서라든가 몰입하게 되고, 물론 갑자기 검마님이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여튼 조용함이 모토.
내 안의 검마님은 솔직히 만능''... 아니 불멸의 존재에 초월자잖아요 영웅즈에게 당한 게 이해가 안 갈 정도야. 영웅들과의 '결전의 그 날' 때 검마님은 모든 힘을 쓴 게 아니고 사실 이건 또 색다른 흐름이군, 하면서 힘 빼고 있었다던가. 사실 검마님 자체는 굵직굵직한 사건만 직접 나서시고 나머진 아래 부하들이 한거라 그냥 흐름 탄다 정도의 마음가짐, 생각, 어둠을 손에 쥔 이후 그 무엇도 의미가 없으니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둔다던가. 그래서 영웅들이 저주에서 풀려나서 하는 짓들은 뻘짓ㅇ<-<이고 원래 봉인 풀리면 세상은 그냥 끝나는건데 '부활'을 해도 딱히 직접 나서진 않고, 변덕이 생기길 기다리는데 이놈의 변덕도 쉽게 안 생기고 그저 최악/최강으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던가. 는 네 저희집 설정일 뿐인거고. 실상은 메이플 끝날 때쯤 되면 검마님 격파하겠지...
여튼 검마님과 은월이 공존한다면 위 설정 기반으로 말그대로 함께 존재하는 것. 누구도 옆에 두지 않는 검마님이 옆에 둔다는 것 자체가 사실 엄청난 특혜니까.
이 둘은 좀더 고찰을 해봐야겠다;Q..
14.4.13
검마은월/ 현패러
촉망받는 인재였다가 갑자기 모든 걸 내버리고 뒷세계 화려한 데뷔&장악해버린 루미너스의 먼 사촌 격인 검마. 검마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인적으로나 법적으로나)날 뻔한 경험에 이 악 물고 검사직에 오른 루미너스. 유능한 해커인 팬텀, 그러나 백수처럼 빈둥거리다가 정보부 쪽에 종종 불려간다. 연예계에서 유명한 헬스 트레이너 아란, 하도 소문 타서 가끔 방송에도 나온다. 이종족 컨셉으로 모델 활동 중인 메르세데스, 아무리 먹어도 살 안찌고 매끈한 몸매로 유명하다. 다만 최소한의 근육도 유지가 되지 않는다는 게 함정. 작은 병원의 수의사인데 어째서인지 인맥이 쩌는 수수께끼의 프리드. 프리드를 키운 것이나 다름없는 옆집 누나 아프리엔. 그래요 내 안의 아프리엔은 여성이지. 혈연도 지연도 없어 갖은 막노동+아르바이트 생활로 전전해오다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한 은월.
은월은 어쩌다 프리드와 안면 트고 그 친구들과도 인연 맺게 되고 몇몇의 권유로 코피 터지게 공부한 끝에 대학 진학. 수강신청에 실패해서 남는 거 집어왔는데 그 중 하나가 '세계의 정치학'. 제법 유명한 교수같은데 강의평가를 찾아보니 이상하게 없다. 갸우뚱하면서도 일단 듣고 보는데 강의 첫날부터 조교가 들어와 휴강이라 선언함. 휴강이어도 남는 시간 마땅히 할 게 없는 은월은 학교 주변을 돌아다니며 지리를 외운다. 경사가 낮고 평지라 넓게 분포된 교내를 해매며 한 바퀴 돌고 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슬슬 기숙사로 돌아갈까 생각하고 연구실이 모여있는 일명 교수동을 지나는데 예사롭지 않은 검은 수트의 남자와 마주친다. 그렇다 머리 좋은 검마님은 무려 교수를 부업으로 삼고 계셨던 것이다..! (두둥)
* 내 안의 검마은월:
정의Justice는 개인이 수단으로 취급되어선 안 된다는 걸 요구한다.
검마는 악으로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을 수단으로 취급한다는 느낌. 은월은 자신을 수단으로 본다는 느낌.
그리고 은월에게서 프리드를 빼놓을 수가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프리<-은월 기반.
* 은월.
은월에게 프리드는 소중하다 그 이상의 존재였을 거라고 생각함. 말그대로 태왕과도 같은 빛. 맞닿은 손의 온기가 심장까지 각인되어 있었고 목소리, 눈빛, 태양을 등지고 흐트러지던 갈색 머리카락 한 올까지. 좀 과장해서 말하면 박제하듯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없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자신의 세계는 없어지고 모든 것이 그대로 돌아가는 세상. 빠진 부품따위 원래부터 없던 것처럼 간단하게 지나치는 시간과 인연. 있을 장소를 찾는 데 선악의 구분은 필요하지 않다. 빛이 없다면 저 깊은 어둠 속에 다시 잠들어도 괜찮으리라 하는 유혹. 그리하여 심해보다 깊숙히, 바닷속에서 너의 파편이나마 무의식 중에 바라볼 수 있다면 두 눈을 찔러서라도.
깨어나는 순간부터 어렴풋이 감지한 존재. 자연의 이치와 어그러진 섭리는 너무나도 규칙적이라, 변칙적인 '감정'에 흥미를 보였다.
끝없이 어둠을 헤매이는 그림자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아침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일그러져버렸군, 너. 그땐 이런 눈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 모든 것에 무뎌진 와중에 한 줄기 빛을 놓지 않고 거기에 익숙해진 눈빛이었지. 그래, 기억나는군. 이것이 '배제된' 너인가. 볼 만한 걸.
파란 힘줄이 불거져올랐다. 그러나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손끝에서 심장으로, 머리로 파고들었다.
마침내 너의 목소리가 ───잡음이 되었다. 노이즈.
* 내 안의 프리드는 이런 느낌. Sekai no owari의 [화조풍월] 브금.
나는 무엇을 잊고 있었을까? 조용히 바람이 속삭였다.
평온하고 올곧다. 치열한 눈을 하고 동료들과 싸워왔다. 이별은 슬프지만 절망하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지 않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어째서인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답을 바라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계속 걸어나간다. 멈추지 않는다.
* 하얀 마법사 후반~검은 마법사 직전. 쿠라하시 요에코의 [流星 (유성)] 정도.
멜로디는 유쾌하지만 가사는 그렇지 않지. '사랑하는 대상' '당신'은 진리, 궁극의 빛. 사랑하는 것에 지쳐서, 이내 타올라 사그라든다.
아마 궁극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한 것 뿐. 새로운 길을 찾을 여력이 없었다. 뒤돌아 '다른 것'을 사랑하기로 했다. 미련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도처에 있는 것은 어둠. 어디로나 통하는 길목.
灰になる もう灰になる
재가 될래 이젠 재가 될래
愛することに ただ疲れたの
사랑하는 것에 그저 지쳐버렸어
悲しいと 人は空を見るんですね ほらね
슬프면 사람은 하늘을 보네요 그렇죠
結局 私は一人きり
결국 나는 혼자
出会った意味などありますか?
만난 의미 같은 거 있습니까?
この流星に願いをひとつ 私を連れて
이 유성에 소원을 하나 나를 담아서
結局 私は一人きり
결국 나는 혼자
学んだ意味などありますか?
배운 의미 같은 거 있습니까?
この流星に願いをひとつ 私よ消えろ
이 유성에 소원을 하나 나 사라져버려
愛した人は もとからいない
사랑했던 사람은 원래부터 없어
悔しいと 人は嘘もつくんですね ほらね
분하면 사람은 거짓말도 하네요 그렇죠
* 프리(->)<-은월 +검마은월. 아마노 츠키코 [聲 (목소리)] 브금 및 가사 활용.
아아. 프리드. [나도 데려가 줘] 오랜 시간 품고 있던 것에 비해면 값싼 한 마디였다.
너의 체온을 갈구하고 있었다.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환상이라 하더라도.
그는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모든 것을 부수었다. 조각조각나 세계는 떨어져내렸다. 은월은 그것을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빛을 몸에 새긴 채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너를 기억하면서. 네가 나를 정화해 줘.
쐐기를 박았다. 날카로운 끝이 연한 살을 꿰뚫었다. 뇌리에 욱씬거렸다.
은월은 본디 보잘 것 없는 개체에 불과했다. 푼돈에 가까운 몸값으로 연명하며 비아냥을 받아도 생을 포기하지 않는, 어째서인지 삶에 대해 끈질긴 애착을 가진 자였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 생각했지만 역으로 어디서도 죽고 싶지 않았다. 고통에 무디어질대로 무뎌졌지만 아픈 건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소망하면서도 갈구하지 않았다. 실로 이율배반적인, 그러나 일직선의 생을 선택했었다.
프리드. 너를 떠올리는 것은 언제나 미소와 함께. 말재간이 없어서 가볍게만 느껴진다. 서툴게 시도한 미사여구를 너는 유려하게 받아주었다. 네 글씨는 단정했고 넌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간간히 풀어놓는 이야기는 생동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내가 이곳저곳을 떠돌며 쌓아온 '실적'들보다 훨씬 가치가 있었다.
프리드가 생존해있다면. 그래서 만났다면, 또는 그 사실을 전해듣는다면. 검마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늘 저녁 메뉴를 묻는 것처럼 생존 소식을 알린다. 두 눈을 깜빡, 깜빡이더니 아.. 작게 침음성인지 감탄인지, 내뱉으려던 말의 초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한 번 달싹였다. 그리고 끝. 은월은 분명 도피로써 검마의 곁에 왔지만 현실도피와 반동으로 생존해있는 것만은 아닐 거야. 그는 원래부터 그랬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 생각하지만 반대로 어디서든 죽고 싶지 않은, 묘한 집착. 다만 고통에 조금 더 무뎌졌을 뿐 등골을 스치는 오싹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전율하지 않는다. 그렇게나 갈구했는데 막상 마주하니,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어.. 스스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검마는 초월자의 시선으로 은월을 바라본다.
그리고 꿈 속에서. 은월은 악몽치곤 산뜻하고 장면이 빠르게 전환되는 꿈을 꾼다. 회백색 세상에서 처음으로 '색으로' 빛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진리를 꿰뚫는 붉은 눈동자. 은월은 그 다음으로 밝게 타오르는 너(프리드)의 혼을 두 손에 가둔다. 부술듯 으스러뜨리지만 형체도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진다. 문득 손바닥에 콩알만한 구멍이 뚫린다. 손을 들어 그 속을 들여다본다. 심해마냥 고정되어있는 그 속에 네가 지느러미를 부드럽게 흔들며 유영하고 있다. 그래서 구멍에 몸을 넣는다. 온 몸의 뼈가 바스라지고 으깨지는 소리가 꿈치곤 생생하게 울려퍼지는데, 개의치 않고 넣는다. 마침내는 얼굴만이 남았다. 심장을 밀어넣으며 은월은 자신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나를 정화해줘. 구원해줘. 고통을 주지마. 물고기처럼 빠끔거리며 구멍을 삼켰다.
목이 잘린 단면 아래 긴 흑발이 젖어들었다. 희고 긴 손가락이 홀로 남은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였다.
例えば海の底で あなたが生きてるのなら
만일 바다의 바닥에 당신이 살아있다면
私は二本の足を切って魚になろう
나는 두 다리를 잘라 물고기가 될게
深海へ落ちるほどにあなたが近づくのなら
심해로 떨어질 정도로 당신이 가까워진다면
果てない闇を彷徨う影になってもいい
끝없는 어둠을 방황하는 그림자가 되어도 좋아
例えばこの言葉が あなたにとどくのならば
만일 이 말이 당신에게 닿는다면
私の聲帶を取り上げて捨ててもいい
나의 성대를 빼앗아 버려도 좋아
求めていた
원하고 있었어
幻でも
환상이라도
罰も拭うその腕に抱かれ流れ眠りつきたい
죄도 닦아내는 그 팔에 안겨 흐르며 잠들고 싶어
昇る昇る太陽が私の場所を淨化する
떠오르는 떠오르는 태양이 나의 장소를 정화하고
蝕んで行く拔け落ちて行く私を塞ぐピアスが足りない
침식해가는 떨어져가는 나를 막을 피어스가 부족해
14.4.14
검마은월/ 현패러 썰 추가
1) 은월은 원래 적당히 중간 자리즈음 앉는다. 맨 앞을 부담스러워하는 건 아닌데, 수업시간 5분 전으로 맞추어가다보니 맨 앞은 이미 차있고 앞부분은 지인끼리 그룹끼리 모여앉아서. 다만 검마님 강의 시간에는 거의 뒷자리에 앉는다. 유명강사의 이름이 헛것은 아니라 앞중반은 이미 다 차있는데다가, 지긋 눈을 마주쳐오는 붉은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하지만 검마님은 앞에서만 강의 하는 게 아니라 나른한 걸음으로 은월의 옆자리를 천천히 스쳐가겠지.
2) 은월이 머리를 기른 이유는 (a.겨울에 따뜻해서) (b.매번 잘라야지 해놓고 바쁜 일이 생기거나 잊어버려서) (c.이후에는 프리드가 아까우니 자르지 말라고 만류해서) (d.머리에 폭싹 파묻힌 느낌을 좋아해서. 또는 익숙해서?) 현패러 검마은월은 원작보단 달달한 게 가능할 것 같다. 그러니까 (e.검마님이 은월 머리 끝을 살짝 들어 만지작거린 이후 차마 자를 수가 없어서) 를 추가하자.
3) 검마에게 다정함 따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연애를 할 수가 있는가. 우선 첫째로 둘의 관계는 어느 한 쪽이 고백을 했다던가 하는 정식 연인 관계가 아니라는 점. 둘째로 검마님은 안그래도 넘쳐서 밖에서는 자제하는 페로몬을 은월과 있을 때는 아예 퍼붓는다는 점. 은월은 검마에게 대놓고는 아니지만 은근히 약하고 검마는 그런 은월의 반응을 재미있어한다. 한마디로 검마님이 주도하는 관계라는 겁니다.
14.4.15-4.16
검마은월/ 검마냥이 썰/ 개인설정 주의, 막상 검마은월 나오기 전에 썰이 설정으로 끝나버림
계기: 검마가 고양이로 변해서 멀뚱히 쳐다보는 게 보고싶다. 은월도 고양이? 아니 얜 사람. 귀신이랑 엮인다든가.
그래 은월은 정령이니까 귀신으로 엮자!
그래서 귀신을 볼 수 있는 쪽: 루미너스, 메르세데스, 프리드, 은월.
대충 귀안은 영혼을 볼 수 있는 눈, 귀기는 영혼이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기운, 영기는 제령할 수 있는 기운 정도로 생각하면 될듯.
일반인들은 보통 귀기보다는 영기가 많거나 귀기와 영기가 같다. 즉 귀기<=영기.
영기가 어느 수준 이상 강한 사람들은 수호령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
귀신이나 령이나 혼령이나 다 같은 뜻으로 사용합니다. 물론 어감의 차이(긍정적이고 부정적인)는 있음.
팬텀에겐 아리아라는 묘령의 여인이 붙어있는데, 언젠가 꿈 속에서~ 만난 적이 있더라도 모름. 그래도 팬텀은 아리아에게 막연한 그리움을 느낀다. 프리드가 특별한 술식으로 둘러놓은 가게에서는 혼령과 인간 사이의 교류가 가능하나, 팬텀은 가게에 가도 영혼을 볼 수 없다. 그는 선천적으로 귀기가 없고 일생에 저쪽(혼의 세계)과의 인연이 손톱때만큼 있다. 일반인이 반반의 확률인 것에 비하면 (좋은 의미로) 매우 특이한 경우. 그래도 프리드의 가게에서는 아리아의 목소리만큼은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곧잘 찾아가는 편이다. 아리아를 알기 전까지는 영적인 존재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그쪽 계열을 헛되고 바보같은 낚시꾼들 투성이라고 비아냥거리곤 했다. 사실 아리아와 대화가 통한 이후에도 그 태도는 변함이 없어서 관련 종사자들과 마찰을 빚기도 한다(루미너스라든가 루미너스라든가).
아란 역시 저쪽과의 인연이 거의 없다시피한데, 그녀의 경우는 팬텀과는 좀 다르다. 본인이 못 보기도 하지만 체질상 영기가 강해서 영의 악의 어린 장난이 먹히지 않음. 마하라는 수호령이 붙어있다. 팬텀과 아리아의 관계와 달리 아란은 마하의 존재를 모르고, 마하 역시 그녀의 곁에 맴도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하다. 마하는 프리드네 가게를 알게 된 이후부턴 그곳에서 살다시피 한다. 아란과 떨어져있어도 그녀 주변의 감각은 느낄 수 있다고.
검마냥이는 원래 인간이었다. 혼혈이든가 선천적 알비노든지 후천적으로 새버렸든지 흰머리였음. 인간->령의 세계로 넘어가면서 검은 털과 붉은 눈동자를 갖게 되었다. 고양이인 이유는 왜 고양이가 아홉 개의 혼을 가진 영적/신적 동물이라고들 하니까. 는 표면적인 이유고 그냥 검마냥이가 보고싶었음. 루미너스 집안이 선천적으로 귀안이 있고 영기가 다분해서 그쪽 일을 대대로 물려받아왔는데 검마는 루미너스 조상격. 집안 특성상 그쪽과의 접촉이 많아 악령의 유혹에 넘어간 이들은 여럿 있었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저쪽의 문을 열고 수호령을 끌어내린 자는 검마가 처음. 집안에서 호적을 파고 사진도 내리고 그래서 루미너스는 아 그런 망할 조상이 있었구나 정도로만 알고 있지 현재 검마의 존재를 모른다. 인간에서 탈피하며 이름을 버렸기 때문에 그를 칭하는 '이름'은 이제 없다. 인간일 때 뛰어난 능력과 외양에 따라 하얀 마법사라고 불렸고 그것을 이어받아 휘하 혼령들은 대게 그를 검은 마법사라고 부른다. 인간들 사이에선 '악귀'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를 본 자는 아무도 없다.
루미너스는 집안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아 귀안이 있고 영기가 강하며 응용력도 돋보인다. 솔직히 검마 이후 이렇다 할 인재가 없어서 매번 제령하면서도 쌓아온 업에 대한 보복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던 집안 어른들은 매우 좋아함. 루미너스는 어릴 적부터 집안의 후계자 소리 들으면서 교육받아왔고 본인도 나쁜 영을 제령하는 것에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 본인이 딱히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것도 한몫 한다.
메르세데스의 경우에는 무녀 쪽 피를 이어받았다. 그런데 이 무녀의 피가 여러 나라의 무속신앙이 뒤범벅되어 내려온지라 순수하진 않음. 그래서 메르세데스는 귀안이 뛰어나지만 영기는 거의 없다. 팬텀과 달리 선천적으로 귀기가 새어나오는 몸이나, 무녀의 혈통을 보조하는 세 령(필리우스, 다니카, 아스틸라)의 도움으로 귀기를 제어하고 있다. 귀기는 귀신과 사람을 불문하고 '영혼'의 호감을 가져오기 때문에 메르세데스는 기본적으로 인기가 많다. 당연한 설정으로 요리를 매우 못한다. 그럼에도 그녀가 연 요리학원이 아직까지도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는 건 귀기 덕분일지도.
은월은 귀안이 있는 일반인. 귀기나 영기나 일반인의 수준이지만 남들과는 다르게 귀기가 영기보다 많다. 게다가 귀기의 양이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늘어나는 특이한 체질.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귀신이 곧잘 꼬였고, 덕분에 이런저런 험한 꼴을 많이 보고 자라 웬만한 걸 봐도 놀라지 않는 강심장을 갖게 되었다. 보통 귀기가 영기를 웃돌면 성정이 비뚫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은월은 강철멘탈소유자답게 침착하게 잘 자람. 자신과 같이 귀신을 볼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프리드를 만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이후 귀신이 평소보다 들러붙는 날(귀기가 늘어나는 날)이면 프리드의 가게로 찾아가 귀기를 억제하는 데 도움을 받는다. 대게 프리드가 수호령 아프리엔의 보조를 받아 귀기를 흡수해주는데, 가끔 루미너스가 있으면 그가 손을 빌려준다. 기브앤테이크 정신이 투철한 루미너스지만 은월과 프리드에 한해 군말없이 도와준다.
프리드는 여러모로 비밀이 많다. 특히 그의 과거는 베일에 쌓여있어 주변 친우들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원래 그에게 귀안이 없었지만 아프리엔을 만나며 귀안이 트이고 스스로의 기운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사후 고통에 겨워하는 영들을 보다 못해 가게를 차렸다. 낮에는 사람을 대상으로 운영하고 밤에는 혼령을 대상으로 영업한다. 프리드 본인은 '악귀'에게 복속된 영혼들의 해방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루미너스의 일을 돕기도 하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기도 한다. 밖에서는 귀신과 사람의 관계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프리드의 가게는 이른바 중립지대. 프리드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루미너스의 서고 등지에서 모은 정보를 종합해 거대하고 세밀한 술식을 만들었다. 그 술식이 새겨진 곳이 프리드의 가게로, 이곳에서는 그 어떤 악령이 와도 제령해선 안 되고 그 어떤 먹음직스러운 귀기를 가진 사람이 와도 달려들어 흡수해선 안 된다. 이를 어기면 강제로 가게 밖 어딘가로 텔레포트됨.
검마냥이 썰; 접촉.
기이할 정도로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은월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 그 시선에 등골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그제야 은월은 집요하게 자신을 쫓던 귀신 역시 어디론가 증발해버린 것을 알았다. 도와준 것일까?
검은 고양이. 세간에서는 불운을 가져온다고 우스갯소리로 입에 올려지는 미물치고는 품기는 위압감이 대단했다. 그 기운이 아직까지도 살갗에 아른거리는 것 같아 은월은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쓰다듬었다. 요 며칠간 평소보다 더 액운이 끼는 바람에 과대망상에 빠진 걸지도 모른다. 프리드에게 가서 이전에 그가 권했던 부적이라는 것을 하나 받아놔야겠다. 그렇게 마음먹은 은월은 골목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은월이 점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한 마천루 옥상에서 그에게 향하고 있는 시선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14.4.17-4.20
If 은월이 용병으로 검마와 만났더라면/ 검마나 은월과 관련되면 언제나 그렇듯, 날조 주의. 중간 생략과 이도저도 아닌 마무리 주의!
은월이 영웅즈와 만나서 결전의 날 이전까지 친해지고 지지고 볶은 거라면,
하얀마법사 에피에서처럼 용병으로 검마와 먼저 만난다면? 하는 이야기.
혁혁한 위명은 잘 들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이 바닥에서 소문은 빛과 같은 속도로 퍼져가기 마련. 가장 위대한 마법사가 타락해버렸다. 자신을 따르는 자들마저 멸절시키고 갑자기 사라졌나 싶더니 최근 들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휘하에 있는 군단장만 해도 어마어마한 인지도를 자랑하는 유명인사들이었다. 각 군단장이 거스린 군사만 쳐도 충분할 텐데 어째서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용병을 고용하는 걸까. 이쪽이야 돈을 준다면 마다할 처지가 아니긴 하지만.
흰 대리석이 아름답게 빛났을 시간의 신전은 케케묵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있었다. 제법 각을 잡고 걸어가던 '동료'들이 귀기 어린 그 모습에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딴에는 작게 말한다고들 하지만 싸움터에서 고래고래 목청을 높이던 목소리 크기가 어디 갈까. 앞서가던 안내자가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가장 뒤에서 일련의 모습들을 지켜보던 은월은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켰다.
바스러진 흔적이 있는 계단을 오르자 거대한 회랑이 나타났다. 보수 높은 일을 맡은 특급 용병이 아니고서야 볼 일이 없는 규모의 신전이었다. 회랑 저편에 위치한 세 개의 문 위에서 각각 색이 다른 보석이 미약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회랑의 끝에서 그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반짝이는 빛을 발견한 주변의 반응이 시끄러워졌다. 그곳에는 금은보화가 쌓여있었다. '저게 그 보수야?' '거 봐, 돈 되는 일이라니까.' '위험하다고는 하지만 오길 잘 했군.' '쌓인 양 좀 보라지. 평생을 놀고 먹어도 남겠어.' 당장 눈앞에 있는 금품에 눈이 멀어 아무도, 마땅히 품어야 할 의문, 여기까지 오면서 그들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그 '일거리'에 대한 걱정은 풀어놓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 원래 혼자 움직이는 성향이 강했던 은월은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동료'들의 대화에 동참하지 않고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 바람에 안내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저 문 앞으로 가면 된다고 전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그것이 그의 행운이 되었다.
그래. 살아남은 것을 행운이라 불러야 하겠지.
은월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좀전까지 있던 회랑이 아니었다.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 자체는 우아했으나 그 아래 깔린 바닥은 시꺼멓게 색이 변질된 채였다. 문에서 이어지는 길의 끝에 폭이 긴 테이블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을 둘러싼 몇몇 인영이 보였다. 온몸이 욱씬거리고 두 팔과 다리가 보이지 않는 힘으로 묶여있는 상태에서도 침착하게 가라앉아있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 뭐야, 다 처리한 거 아니었어? 저런 건 왜 데려와? "
" 마법에 걸려들지 않은 자의 처우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
" 쓸데없이 고지식하기는! 까매서 잘 보이지도 않네. 그것보다 스우, 이게 예뻐 이게 예뻐? "
" … "
음침하고 무거운 분위기와 달리 활발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피부가 검은 청년이 말을 이었다. 그런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타박놓은 소녀는 슥 고개를 돌리며 은월을 관심 없는 눈초리로 스치더니 옆자리에 앉은 소년에게 무어라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 흥미가 없어보이는 얼굴을 하고 소녀를 향할 때만은 부드럽게 미소짓는 소년을 본 은월은 그들이 누군지 깨달았다. 소문의 윙 마스터.
" 딱 봐도 마도계열은 아닌데 아무리 작은 마법이라지만 저항했단 말이지? 가져가서 적당한 데 던져두고 반응을 보고 싶구먼. "
" 명령이 내려온 이상 그 분의 손에 맡겨야합니다. 굳이 손을 댔다가 노여움을 자처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
" 흥! 저런 별 볼 일 없는 떨거지한테 관심따위 없다네. 누구와는 달리 바쁘기 그지 없는 몸이라서 말이지. "
흥미로운 시선으로 은월을 쳐다보던 아카이럼은 데몬의 말에 콧방귀를 뀌더니 옷자락을 끌며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이로써 다섯 군단장이 눈앞에 모였다. 은월은 답지 않게 신분상승이라도 한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손끝을 움츠리며 상념에 빠지려는 정신을 깨웠다.
" 그런데 그 분이 오신다고 하셨단 말이야? 언제나 그 방에서 두문불출하시고 계시더니. "
" 정확히는 저도 알지 못하지만, 그런 뉘앙스였기 때문에… "
군단장들이 말하는 '그 분'이 누군지는 뻔했다. 가장 위대했고 가장 빛에 근접했던 마법사. 하지만 명칭의 변화가 단순히 색상의 변화만을 뜻하는 건 아닐 터였다.
(그리고 아카이럼과 데몬이 참 사이좋게 싸우지만 자꾸 길어져서 생략)
결국 은월을 문 밖에 내놓는 것으로 합의 아닌 결론을 보았는지, 데몬이 바닥에 누워있는 은월을 일으켜세웠다. 냉담한 표정과 달리 강압적이지 않고 조심스러운 태도라 은월은 새삼스레 데몬을 쳐다보았다.
" 얌전히 있으면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
" …그거… 굉장히 고맙군. "
떫떠름한 얼굴로 문 밖에 이끌려나온 은월을 앉히고 마력을 응용하여 등 뒤로 묶었던 마력을 앞으로 바꾸어 묶은 데몬은 다시 문 안으로 들어갔다. 회랑에 덩그라니 남겨진 은월은 굳어있던 몸을 스트레칭하듯 움직였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마력으로 묶여있어 제한이 있긴 하나 바닥에 널브러져있었을 때보다는 움직이기 수월했다.
" 못 보던 얼굴인데. "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지척에 와있는 로브자락에 흠칫 몸을 굳혔다. 앞서 보았던 군단장들과 같은 직급인가 싶어 빠르게 위아래를 훑어보았지만 들어본 적 없는 외양이었다. 뒤집어쓴 로브 아래로 검은 머리카락이 언뜻 보였고 턱 밑에 가져다댄 손가락은 희고 길었다.
" …그냥 평범한 용병이다. "
" 그런 것치곤 평범하지 않은 장소에 평범하지 않은 걸 매달고 있군 그래. "
(꽁냥꽁냥! 은 함정이고 데몬의 마력 포박 솜씨를 감상하는 검마님과
얜 뭐지 뭔가 있어보이는데? 하면서 주박을 풀어내는 은월이 생략되었다고 합니다)
저 편에서 험상궂은 몬스터 무리가 나타났다. 레벨도 레벨일 테지만 같은 복장을 하고 걸음을 맞추어 오는 것으로부터 오는 압박감이 대단했다. 조용히 빠져나가긴 글렀나. 은월은 주먹을 쥐었다 피며 익숙한 너클의 감각을 다졌다. 붙잡혔다면 기본적으로 빼앗겨야 할 무기가 그대로 있는 걸 보니 검은 마법사의 군단이라는 것도 그리 철저하게 운영되지는 않는 듯했다. 아니면 단순히 귀찮았거나. 저 무리 전부를 방 안의 군단장들에게 들키지 않고 쓰러뜨리는 건 무리겠지만 한 줄만 격파해서 지나간다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머릿속에 시뮬레이션을 그리는 동안 존재를 잊고 있던 이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작지만 힘이 담긴 목소리를 잡아챈 은월이 옆에 선 이를 돌아보았다. 로브의 음영에 가려져있던 얼굴이, 그가 돌아서는 바람에 희미한 빛 아래 놓였다. '붉은 눈?'
"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넌 살고 싶겠지? "
(뜬금포에 당황하는 은월과 그런 은월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제 할 말만 하는 로브,
그리고 다가오는 몬스터 무리와 뒤따라오는 군단장 휘하 부하든지 뭐 그런 게 있지만 패스)
" 고용하겠다는 소리지. "
" 고용…? "
이런 상황에서 무슨 느긋한 소리냐, 다급히 외치려던 차였다. 희고 긴 손가락이 가볍게 퉁기는 것과 동시에 코앞까지 다가온 몬스터들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몬스터들이 있던 공간 자체가, 커다란 검은 구에 둘러싸이더니 한순간에 손톱보다 작은 점으로 압축되어버렸다. 그 공간은 지우개로 지워진 것처럼 하얗게 도색되어있다가 점차 주변의 풍경에 맞추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공간 바로 뒤에, 몬스터들을 뒤따라오던 병사가 공포와 의문에 찬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운좋게 검은 구의 경계에 닿지 않아 살아난 그가 벌벌 떨며 " 겨, 경보... " 동료를 부르려는지 얼어붙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것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 멍청하고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서. " 로브의 남자가 친절하게 말했다. 경직된 몸이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검은 구에 먹혀가는 것을 지켜보는 그의 태도는 개미에게 물을 쏟아붓고 잊어버리는 사람의 그것과도 같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무심하기 그지 없을 거란 사실을 은월은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용케 병사의 소리를 들었는지 단순히 육감인건지 문을 열고 나온 데몬이 육성으로 '그 분'임을 확인시켜주고 퇴장(..))
" 검은 마법사. "
" 세간에서는 그렇게들 부르더군. 실로 단순한 조합의 명칭 아닌가? "
" 그렇… 기는 하지. "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몰라 덩그러니 상황을 배제하고 문맥에 충실한 대답을 내뱉는데도 마법사는 여전히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의도가 있어 숨겼다기보다는 묻지 않았기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뉘앙스였기에, 은월은 미간을 슬핏 찌푸리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 생각보다 놀라지 않는 걸. "
" 충분히 놀라고 있다만.. "
표정에 드러나지 않는 것 뿐이지, 은월이 작게 한탄했다.
14.6.20
하마은월/ 음슴체 주의, 프렌즈 이용한 자기만족식 설정, 설정 구멍 주의
하마라지만 하얀쌤일 뿐이고 완전히 다른 사람()
하얀 교생선생님.... 기니까 줄여서 걍 하얀쌤. 하교는 이상하니까.... 여튼 하얀쌤은 신수재단에서 구관을 허물고 새로이 학교를 짓기로 결정한 이래 이 거리를 주시하기 시작함. 평소 신수재단의 후계자와 보좌관들이 낯익어 기억해두고 있기도 했고, 신수재단이 나타난 이래 꾸기 시작한 꿈 때문이기도 했음.
꿈 속에서 그는 어두운 곳에 홀로 있었고, 자의로 그곳에 있는 건 아닌 것 같았음. 하얀쌤은 마치 빙의라도 된 것처럼 1인칭의 시점에서 주변을 바라보면서도 어째서인지 외부의 물리적인 충격들이 자신에게 닿지 않음을 알고 있었음. 다만 꿈이라는 건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째서 이 상황에 처해있는지 의문도 들지 않았음. 꿈 속의 어두운 공간은 하얀쌤의 정신이 객관적으로 판단하기에 커다란 구 같았음. 좁진 않았지만 외부로부터 꿈 속의 그를 격리하기 위한 공간이라는 게 한눈에 봐도 보였음. 하얀쌤은 몇 번이고 꿈을 꾸지만 그때마다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음. 꿈 속의 그는 '갇혀'있었고 그 누구도 곁에 없었음. 다만 의외였던 건 그러한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대상이 보여야 할 분노나 억울함, 공포와 같은 감정이 꿈 속의 그에겐 없었음. 잠들어있는 것처럼 평온하기 그지없는 정신상태가 하얀쌤의 뇌리에 고스란히 잡혔음. 굳이 말하자면 상황에 흔들리거나 구애받지 않는 냉정함과 침착함이었음. 거기엔 희망같이 부질도 가망도 없는 동아끈이 없고 그러한 상황을 얼마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부수고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기반한 확신이 있었음.
그러한 상황을 며칠이고 연속해서 보고있자니 하얀쌤은 슬슬 지겨워졌음. 그런 본체()의 감정에 무의식이 반응한 것인지 꿈을 꾸기 시작한지 일주일이 되던 날, 드디어 어둡기만 한 구체 속의 공간에 변화가 생겼음. 쩌적 빛이 나며 주위가 갈라지더니 와장창 효과음을 동반할 것처럼 산산조각나버렸음. 그러나 꿈 속이기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음. 구체에서 벗어난 꿈 속의 그는 천천히 몸을 폈음. 얼마나 오랜 기간 같은 자세로 있던 것인지,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으스러지는 관절과 근육이 보였음. 굳은 육체를 풀고 나서야 하얀쌤은 주변에 그 이외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챔. 하지만 뒤집어쓴 로브에 가려서─그제서야 하얀쌤은 자신이 치렁치렁한 로브에 두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림─ 인영을 구별할 수 없었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꿈 속의 그는 가벼운 손짓으로 주위를 물렀음. 그는 마치 현 상황을 음미하는 것 같았음. 실제로 꿈 속의 그는 매우 만족해하고 있었음. 모든 것은 그의 계획 아래였고 불편하던 구속에서 풀려나 맞는 자유는 수월했음. 꿈 속의 그는 먼 곳을 바라보았음. 그의 시선에 담긴 것은 그에게 저항하던 대륙의 현재 모습이었음. 천천히 필름을 돌리듯 현재의 세상을 둘러본 그는 그러나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음. 그가 풀려난 것만으로도 세상에는 변화가 야금야금 좀먹어들고 있었음. 거기까지 지켜보던 하얀쌤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꿈 속의 그와 같은 위치에서 세상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함. 하얀쌤의 앞에 꿈 속의 그가 자신의 왕좌에 앉은 채 느릿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턱을 훑었음.
'이 세상에는 같지만 다른 세계가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군… '
'그렇지 않나?'
'하얀 ───'
움찔, 한순간 경련하며 하얀쌤은 눈을 뜸. 잠들기 전과 같은 천장이 그를 맞이했음. 아무리 꿈 속이라지만 천하의 그가 긴장을 한 탓에 호흡이 거북하게 느껴졌음. 하얀쌤은 천천히 숨을 가라앉히면서 생각을 정리함. 오늘에서야 확실히 알게 되었지만 꿈 속의 자신은 정말 '자신'이었음. 다른 세계의 또다른 자신이라니, 이 세계에 있는 미신인 도플갱어나 분신술같은 것보다 훨씬 현실성이 없었음. 하지만 하얀쌤은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닌 또다른 현실이라는 사실을 직감했음. 꿈으로 치기엔 너무 정교하게 구현되었다는 사실도 있지만 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음. 비현실적인 힘의 개입을 배제할 때 그는 이 세계에서 완벽에 가까운 존재였고 직감은 이성과 더불어 그의 훌륭한 동반자였음. 하얀쌤은 오늘 확신한 사실을 전제로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했음.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음. 이미 모든 변수를 정리한 '계획'은 그의 머릿속에 펼쳐져있었음.
생각이 깊어지던 와중 문득 시계를 본 하얀쌤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킴. 평소보다 꿈 속에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평소보다 오래 잔 것도 아니었음. 규칙적인 생활은 이따금의 변덕을 제외하면 그의 습관이고 생활이었음. 그리고 그는 또다른 그의 습관이자 생활을 마주하러 방을 나섬. 그의 어린 동거자가 그를 반겼음.
하얀쌤이 소년을 만난 것은 그가 19살일 때였음. 특출난 그도 나름 정규학업과정은 충실히 밟아왔는데 솔직히 지식은 학교가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충분히 쌓았고 졸업 후엔 바로 해외 모 대학의 산하기관으로 들어갈 예정이었음. 이 나라의 고등과정은 아쉬울 것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았음. 학업 중에도 이름난 곳에 불려다니며(그걸 거부하지 않으며) 모국에 대한 예의를 지킨 건 그가 스스로의 육체적/정신적 성숙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 해외로 나간 이후에는 어차피 국적 등 모든 '정보'가 지워지겠지만 일단 훗날의 혹시나 모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는 마지막까지도 원만한 교우관계와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음.
하얀쌤은 그를 '후원'하는 재단이 마련해준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음. 야자에서 면제되는 건 그에겐 당연한 일이었음. 재단에서는 1주일에 한 번씩 그에게 새로운 지식이 담긴 논문과 연구거리를 보내오는데, 그는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근처 사립도서관에서 필요한 책을 빌려와 읽으며 재단의 메일을 기다리는 중이었음. 그런데 언제나처럼 발송된 메일에는 그가 바란 후속 논문과 실측자료가 아니라 긴 글이 적혀있었음. 마지막에는 사진이 하나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음. 드물게 의아해하던 시선이 진중하게 변하고 이내 흥미어린 것으로 바뀜. 그는 답장을 보내고 바로 다음 날, 재단의 직원이 그의 집을 방문함.
직원은 한 소년과 함께였음. 이게 그?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usb를 건네고 사라짐. 그는 소년을 내려다보았음. 그의 명치에 이르는 키의 소년은 이상하리만치 인상은 흐릿했음. 어깨에 닿을락 말락한 흑발에 헐렁한 흰 티셔츠, 무릎 아래로 간당간당한 면바지 조합은 재단에서 보호하던 것 치고는 성의가 없었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어 그의 눈높이로는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음. 일단 그는 자료를 확인해보기로 하고 소년에게 '친절하게' 말을 검. 거실 소파에 앉아있으라는 그의 말에 소년은 순순히 발걸음을 떼고, 그는 방에 들어가 노트북으로 자료를 살핌.
재단이 보내온 바는 이러했음: 해당 개체, 이하 소년은 어느 날 갑자기 재단 산하 연구실에 나타났음. 처음엔 같은 방의 연구원들조차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상부에서 시찰을 돌다가 발견함. 재단에서는 소년을 확보, 여러가지 조사 과정을 통해 소년이 평범한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림. 그러나 소년의 존재와 행적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식되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은 분명 있으며 아마 소년에게는 타인의 인식에서 사라지는 무언의 힘이 있으리라 추측됨. 다만 소년 자신은 그 힘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음.
재단이 소년을 그에게 보낸 건 그가 최근 몰두하는 주제가 '기억'과 '소멸'이었기 때문임. 재단이 보낸 메일 속 사진에도 소년은 찍힐 당시엔 분명히 사진 속에 있었지만 그가 메일을 확인했을 때 사진 속에는 아무도 없었음. 그는 재단이 상당히 흥미로운 연구거리를 보내왔다고 생각함. 재단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일류 엘리트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소년에 대해 알아낸 것이 이정도 뿐이라는 건 파헤칠 만한 보람이 있단 소리였음. 그는 그렇게 소년을 받아들이고 그 날부터 함께 살게 됨.
꿈 속의 그는 하얀쌤에게 부러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또다른 자신이라는 걸 증명하듯 말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정보는 머릿속에 흘러들어왔음. 그를 통해 하얀쌤은 이 세계에 생긴 균열의 존재와, 그 균열이 자신이 또다른 세계의 자신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 이래 생겨났다는 사실을 깨달음. 그리고 저쪽 세계에서의 '이능력'과 '관여자'들에 대해서도 알게 됨. 균열이 생긴 이상 수호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분명 이쪽으로 건너올 것이고, 건너오는 이는 상당한 능력과 지위(명성)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음. 하얀쌤은 저쪽의 자신(이하 검마)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알 것 같았음. 검마가 차단한 부분이 있어 전말을 전부 꿰뚫은 건 아니지만 근원이 연결된 '자신'이니만큼 판단할 수 있었음. 하얀쌤은 기꺼이 검마의 의도에 놀아나주기로 함. 이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활용 방법은 충분히 매력적인 먹이였음.
그의 행동 하나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광신도처럼 구는 여학생들은 솔직히 시끄럽기 그지없었지만 호의라는 감정은 그가 이용하기에 매우 적합했음. 그래서 그는 아주 손쉽게 신수학교에 잠입()할 수 있었음. 그의 외양은 누구나가 인정하다시피 매우 눈에 띄었고 그로 인해 많은 혼란을 가져왔음. 덕분에 하얀쌤은 금세 이계의 존재들과 마주하게 되었음.
여타 학생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의 그 '전학생'을 관찰하며 하얀쌤은 여러가지 사실을 알게 됨. 우선 꿈 속의 자신의 영향으로 '전학생'이 모습을 숨긴 기이한 술책은 자신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 옥상이나 교내에서 눈에 띄곤 하는 동물들 역시 이세계에서 왔으며 자신이 부리는 힘과 상극인 능력을 사용한다는 것. 검마의 힘은 선악을 떠나 절대에 가까운 느낌이었지만 균열을 넘어와서 그런지 하얀쌤이 발현한 힘은 아무래도 악 성향의 어둠에 가까워보였음. 마지막으로 '전학생'과 동물들에게조차 소년의 힘은 발휘된다는 것. 하얀쌤이 교생으로서 있는 내내 이계인들은 소년을 평범한 학우로 받아들였고 특별히 소년을 인식하지 못했음. 이외에 힘을 부리는 요령을 터득하고 새로이 얻은 지식을 이쪽 세계에 적용하여 이쪽에선 풀지 못한 것들을 풀어낸다든지 하는 것들도 가능했음.
더불어 그의 어린 소년은 학교라는 것을 체험해보았고, 하얀쌤은 소년을 그가 수업하는 반으로 집어넣음으로써 고등과정이라 보기엔 너무나 간단하기 그지없는 수업에 가르치는 당사자가 지루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음. 그 방지 턱이 어느 정도였냐하면, 하얀쌤은 여학생들이 아무렇게나(그들 딴에는 진심을 담았겠지만) 던지는 사생활에 대한 질문에 두루뭉실하게나마 대답해줄 의사가 있었음. 그에게 있어 진실을 거짓으로 포장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고 소년이 아닌 척 하지만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임. 주임선생이 중재하며 가장 무의미한 질문이 남았지만─ 겉보기에 현혹되어 찬사하는 이들을 기꺼워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호감은 필요했기에 하얀쌤은 간단한 대답을 함. 그리고 그는 눈동자가 슬쩍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소년을 놓치지 않음.
'전학생'은 그의 추종자(자칭)들로 인해 생겨난 어둠의 찌꺼기들을 제거하고 그가 소환한 트러블메이커까지 퇴치한 뒤 다시 이계로 넘어가버렸음. 관련된 모두의 기억을 지우는 술수를 썼겠지만 애초에 검마와 꿈으로 연결되어있는 하얀쌤에겐 소용이 없었음. 다만 소년은 이계인들을 잊었음. 하얀쌤에겐 그것이 가장 의외이자 놀라운 사실이었음. 소년에게는 이계의 능력이 통했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음.
이후 그 '전학생'이 다시 이 세계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감지한 하얀쌤은 서늘하게 웃었음. 어쨌거나 교생을 가장한 관찰놀이로 그는 많은 정보를 손에 넣을 수가 있었고 '비현실적인 힘'을 직접 조합해 사용하고 결과를 얻었음. 이계인들이 무엇을 하든 간에 하얀쌤은 그들이 모르는 곳으로 도약하고 있었음.
14.8.14
If 은월이~ 썰 이어서.
" 네 이야기를 해봐. "
어쩌다 이야기가 이런 쪽으로 흘러가버렸는지. 은월은 나지막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잠시 펼치던 상념을 접었다. 머릿속에서 팔랑거리며 날아가던 물빛 나비가 물에 빠진 설탕덩어리처럼 녹아내렸다.
마법사는 세간의 악명처럼 잔인무도한 살인귀도 파괴광도 아니었다. 그의 곁에 있는 짧은 시간 동안 마법사의 성정을 얼추 파악한 은월은 그렇게 결론내렸다.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려는 행동을 보이지도 않고(그의 수하들은 제쳐두자) 아무 마을이나 골라 파괴하고 학살하지도 않고…
세계를 주름잡는 악의 축이 등장했기 때문인지, 검은 마법사를 차치하고서라도 세상이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탓인지 세상은 뒤숭숭했다. 몬스터가 횡횡하고 강한 자가 약자를 약탈하고 짓밟는 세태 속에서 용병의 숫자가 늘어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족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다행히 은월에게는 제 몸 하나 추스릴 힘이 있었고, 세상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도움을 받은 용병의 뒤를 이어 은월은 동패를 받았다.
" 동패? "
" 용병들도 패로 직급을 나눠. 막 용병이 된 햇병아리들은 아무런 패도 소지하고 있지 않지. 그래서 높은 패를 가진 자들이 만든 단에 들어가거나 패를 가진 자와 개별로 팀을 짜 움직여. 보통 상위 패를 소지한 자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거나 일정한 공로를 세우면 마을 단위로 패를 내려주고, 발급받은 패는 협회에서 인증을 받아야 해. "
" 오합지졸이라도 나름 위계질서가 잡혀있는 셈인가. "
" 뭐, 그렇지. 금패를 가진 자는 역시 거의 없다. 용병일에 구애받지 않고 나라나 집단 단위로 일을 받는다는군. 그런 탓에 이 땅에 이름 있는 용병단도 드물지. "
" 넌 동패라고 했나. 예상했던 것보다 등급이 낮아. "
" …내 실력을 과대평가 해주는 건 고맙군. 하지만 개별로 활동하는 용병은 은패 이상 받기 힘들어. "
뜻하지 않은 상대로부터 높이 평가받는 기분은, 글쎄. 기쁘기보단 오히려 떫떠름했다. 웬만한 상대라면 무슨 속셈인지 경계했을 테지만 그는 술수를 부릴 정도로 조악한 마법사가 아니었으니까.
" 아니. 과대평가가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 뿐. 평야의 어느 나라에서는 실력을 3할 감추는 것이 관례라고 했지… 가장 중요한 무언가는 속이 저며둔다. 그리하여 최후에 승자가 될 수 있도록… "
조용히 이르는 말. 감추어둔 한 수를 들켰다는 사실에 흐트러지는 호흡을 갈무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해한다. 이쪽을 향해있으면서 먼 곳을 바라보는 붉은 시선을 알아차리고 생각했다. 저건 스스로를 투영한 말이다. 천하의 검은 마법사도 모든 것을 드러내진 않았다는 사실은, 세계적인 관점으로 볼 때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렴 상관 없나. 세계가 악의 손아귀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멸망해서는 안 되는 이유 따위 은월은 알지 못했다.
용병일로 근근히 목숨을 연명해오던 십 수년보다 이곳에 있는 며칠이 훨씬 평화로웠다. 식사나 주머니 속 돈이 아닌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어쩐지 눈이 감겼다. 은월은 이곳, 검은 마법사의 공간에서 안정을 느꼈다. 기이한 일이었다.
" 심심하진 않나? 이 생활이. "
살갗에 스물스물 기어올라오던 어둠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근원이 바로 옆에 있는 만큼, 이곳에서는 정신을 바로잡지 않으면 마음이 어둠에 먹혀버리기 쉬웠다. 일부러 도와준 건가? 은월은 반쯤 감기던 눈 위를 손가락으로 몇 번 누르며 마법사를 보았다. 그 날, 군단장에게 포박을 당해 탈출을 꾀하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의 손을 잡은 이래, 마법사는 이따금 은월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왔다.
" 나쁘진 않아. "
시선이 마주친 순간 붉은 빛이 곱게 접히는 듯 했지만, 착각이겠지. 역시 아무리 봐도 무섭기 그지 없는 악의 대명사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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