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02 Somewhat
*시간 날조
*봉인 전이나 이름 은월 지칭
*캐붕 죽고싶다
“ 불편하면 굳이 참아가며 안 있어도 되는데. “
팬텀이 어느 틈엔가 곁에 다가와 사과주를 잔에 따랐다. 지나가는 듯 툭 던진 말치곤 시선이 힐끔 저를 향하고 있어, 은월은 포크로 접시 위의 닭가슴살을 끼적였다. 딱히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가 여실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팬텀은 한 모금 입에 머금고 뺨을 살짝 부풀리더니, 완전히 잘리지 않고 반만 잘려 포크에 대롱거리는 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이 노골적이라 없던 입맛도 떨어지는 듯했다.
“ …갑자기 왜. “
“ 갑자기라니. 척 하면 척이구만. 설마 잘 숨기고 있다고 안심하던 건 아니지? “
그야 아니었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에 익숙했을 뿐이지 기어오르는 마음을 다잡아 누르고 아닌 양 가장하는 건 여전히 서툴렀다. 앞으로도 익숙해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으니. 이 무리 중에서도 유별나게 눈치가 빠른 팬텀을 속일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도 분위기를 거스르길 좋아하지 않으니 알아서 넘어가 줄 것이라 여겼고, 실제로도 그래왔다. 지금까지는.
“ 나를 위해 모인 자리를 내가 불편하다고 파할 순 없어. “
“ 왜, 그냥 박차고 나가면 돼지. 너 평소에는 잘 그러잖아. “
“ 누구를 무법자로 만들고 있어. 그런 말 할 거면 저리 가서 케이크나 마저 비워. 남았다고 또 애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어쩌려고. “
절반 넘게 사라진 저편의 케이크를 향해 고갯짓하자 느릿한 거부가 돌아왔다. 그냥 신경을 꺼야겠군. 팬텀이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위치하도록 몸을 틀 때였다. “ 무서워? “ 실로 담백한 물음이 떨어진 것은.
“ 무엇이? “
“ 피하려고 하잖아. 집채만 한 몬스터가 달려들어도 정면에서 맞서면서, 고작 이런 거 갖고. “
“ 그런 적 없어. “
“ 지금 나 안 보고 있는데? “
네가 또 무슨 소릴 징징댈까 귀찮아서 그렇지. 은월은 퉁명스레 내뱉으며 접시를 내려보았다. 좀 더 푹 익은 살로 가져올 걸 그랬다.
“ 날 괴롭히는 마법사는 지금 저기서 프리드랑 화기애애하고 있는데? 나 완전 잘 나가는 괴도인 거 몰라? 꼭 내가 만날 와서 궁상떠는 것처럼 얘기한다~ “
“ 아, 그래. “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만한 무심한 답을 흘리곤 적당히 식은 살을 씹고 있으려니 옆이 잠잠해졌다. 포기하고 가버린 건가. 한숨을 삼키며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물, 아니 탄산이 좋겠어. 퍽퍽해서 목이 멨다.
“ 이거 찾아? “
웃음기 섞인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눈앞에 내밀어진 잔에 순수하게 고마워했을 텐데. 은월은 기포가 보글 올라오는 옅은 액체를 잠시 노려보다 받아 단번에 들이켰다. “ 어라, 뭐라고~? 안 들리네. “ 엎드려 절 받는 꼴이다. “ 고맙다고. “ 고개 돌려 깐죽대는 얼굴을 향했다. “ 뭘, 별말씀을. “ 팬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 무슨 대답이 듣고 싶어서 그래. “
“ 그냥. 왜 굳이 참는지도 궁금하고, 참아야 할 만큼 불편한지도 궁금하고. 정말 싫다면 아예 확실하게 말해서 선을 그어. 어중간하게 질질 끌어봐야 쌍방이 피곤해질 뿐이니까. “
어조는 가벼웠지만 속내는 매서웠다. 돌려 말해 봐야 제가 답하지 않을 것을 알아서겠지. 은월은 아주 잠시, 그것이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발끈해야 할지 충고 고맙다며 고개 숙여야 할지 극단의 선택지를 두고 고민했다. 하지만 또다시 저를 피하지 않게 하겠다는 양 살살 눈웃음치며 마주해오는 푸른 시선에, 가느다란 스탬을 손톱 끝으로 눌렀다. 뚝 꺾이기라도 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싫지 않아. 조금… 익숙하지 않아 그래. “
“ 그래? 그런 것치곤 웃고 떠들고 잘 화답해주더만. “
“ 이상했다는 것처럼 말하더니. “
“ 느낌이 팟 왔다 이거지. “
“ 그거 잘못 온 거 같은데. “
“ 나 넘기면 쟤 부른다? 우리 리더 성격 끈질긴 거 알지? “
누가 모를까. 프리드는 유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완고한 구석이 있었다. 제 울타리 안으로 인정한 동료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하면 그의 의사를 존중하여 묻지 않되, 계략인지 천연인지 알 수 없는 시무룩한 얼굴로 그가 털어놓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만들 터였다. 적어도 은월은 그 과정을 이미 몇 번 겪어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묻는 것이 속 편했다. 후 숨을 내쉬었다.
“ 싫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 아냐. 익숙하지 않은 것도. 전까진 이렇게 축하받은 적도 없고, 애초에 생일 따위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고. 설마 처음 만난 날을 기념으로 삼을 줄은 몰랐으니까. 어색하지. “
어색하지. 재차 반복하고, 짧은 침묵. 팬텀이 잔을 쪼르르 채웠다. 은월은 제 빈 잔도 내밀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 마음이 돌아올 거라고 어떻게 믿을까. 호의가 호의로, 적의가 적의로. 내가 보이는 마음이 상대에게서 같은 마음으로 돌아올 거라고, 어떻게 확실할까. “
“ 우리가 대가를 바라고 축하한다고 생각해? “
“ 아니. 그렇지 않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불안해. “
나는 결코 타인과 같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하거나 느끼고 바라는 것을 상대가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바라준다는 보장이 없다. 감정의 저울은 항상 비대칭으로 기울어져 있다. 길지 않은 생에 보아온 관계들이 그러했고 세상 대부분이 그러했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고 여겼다. 적당히 상대의 눈금에 맞춰 제 기색을 내보이면 그만이었다.
하나 간과한 것이 있다면,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감정을 따라 틀에 맞출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 진심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 진심에 진심으로 대응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있어서 그래. “
순수한 호의와 마음을 정면에서 받아들이고 있으면, 고마움과 동시에 두려움이 일었다. 자신은 돌려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같은 무게의 마음을 요구하지 않고, 그런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알아도 무심코 보답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감정은 생각을 따라 움직이지 않아, 은월의 내면에는 항상 생각하는 자신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자신이 존재했다.
“ 너희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야. 그런 걸 드러내서 분위기 흐트러뜨릴 이유는 없고. “
흐음. 그게 드러나서 문제인 건데. 팬텀은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본인은 나름 잘 감추고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지만, 타고나길 눈치가 빠른 자신이나 사람 대하기 능숙한 프리드는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기 전부터 읽어냈다. 알아차리고서 더욱 해맑은 얼굴로 파티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속이 좀 시꺼메 보이지만. 아란은 짐승보다 예민한 감의 덕을 본 것 같고, 에우렐에서 급한 전령을 받고 잠시 자리를 비운 메르세데스나 루미너스는… 뭐, 샌님이 이렇게 섬세할 리가 없으니 넘기자.
자존감의 문제인가 하면, 본인이 알고 있다고 못을 박은 시점에서 타인의 말은 무의미했다. 어쭙잖은 설교가 통할 리 없는데 그걸 붙들어 땅 파지 말라고 달달 볶을까. 무리, 성정에 맞지도 않고. 팬텀은 고개를 내저었다.
“ 너도 참 피곤하게 산다. 그렇게 섬세해서 어떻게 살아왔나 몰라. “
“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으니 그만해. “
“ 네, 네. 특별히 비밀로 해줄게. 괴도의 이름을 걸고! “
팬텀이 제 입을 살포시 가리는 시늉 했다. 둥글게 휘어진 눈매가 얄쌍해 그다지 신뢰가 가진 않았다.
“ 어쨌거나, 생각하는 건 대강 알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혼자 동떨어져 있진 마. 주인공이 구석에서 음식 깨작거리고, 폼도 안 살게. “
“ 불만이면 잘 익은 부분으로 한 접시 가져다주던지. “
빈말로 내뱉었는데 그러지 뭐, 팬텀은 생각 외로 순순히 멀어졌다. 음식을 새 접시에 담는 와중에 디저트를 가지러 온 루미너스와 시비가 붙어 아웅거리는 모습을 보며 은월은 비식 웃고 말았다. 조금이나마 언어로 드러낸 속내는 금세 잊어버린 것처럼.
+
태어난 정확한 날짜를 알지 못하는 은월에게 그럼 우리 만난 날을 생일로 하자! 매듭지어버린 건 프리드.
+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 사지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음에 안도하는 시간. 익숙해지는 것이 사치가 되는 그 일말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은월. 차차 익숙해지길 바라면서.
+
다가가 직접 물어보는 팬텀.
지나가며 등을 팡 두드려주는 아란.
에우렐의 아이들에게서 받아왔다며 선물 넘겨주는 메르세데스.
복슬한 머리 무심하게 한 번 쓰다듬고 멀어지는 루미너스.
웃는 얼굴로 기다리는 프리드.
속앓이는 정도껏 하자.
+
만나서 기뻐.
태어나줘서 고마워.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
그렇게 말하며 웃는 동료들이 어쩐지 눈부셔서.
감격했어?
그래.
순순히 긍정했다.
+
선물은 내 마음♡ 드립치는 어딘가의 팬텀이 있을지도.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지, 새로 개발한 회복약 선물하는 루미너스. 는 누군가 슬쩍 바꿔치기한 변신물약 때문에 검은 강아지(2018년 무술년)로 변해버린 은월과 한바탕 대소동이 있을지도. 부농젤리만 부농부농했다나. 한숨 쉬던 강아지는 머리 위에서 살랑거리는 아란의 머리타래를 잡으려고 본능적으로 쫑쫑댔고 핫 정신을 차렸을 땐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다가 실피디아의 날개 아래 숨었다던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선 제일 먼저 물약 바꿔치기한 원흉의 머리에 딱밤을 먹였다던가?
그런 이야기도 있었을 법하다.
+
아직도 불편해?
그 불편함도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할 건데 어쩌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
마음이 같지 않아도 돼. 기울어져 있으면 어때. 괜찮아.
하루 정도는, 오로지 너 자신을 고민하고 받아들이는 시간으로 해도.
그래도 기왕이면 같이 나눠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한 순간이기도 해.
+
뿔뿔이 흩어져 다시 모이기까지, 생각보다 시간은 짧아.
그리고 그때 다시 마주하는 순간은 결코 지금과 같지 않겠지.
아직은 누구도 모르는 미래.
+
그때가 오기 전, 언젠가의 미래. 고마워. 은월이 말하고
뭐얼, 키득거리는 팬텀.
저 녀석에게선 오히려 네가 감사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혀를 차는 루미너스.
왜 갑자기 뻣뻣하게 굴고 그래, 호쾌한 아란.
고마우면 나중에 놀러 와. 생글 웃는 메르세데스.
응, 나도. 눈꼬리 접는 프리드.
+
있었으면 좋겠네.
+
기억이 안 나? 음, 으음… 아!
그럼 처음 만난 날을 생일로 하면 되겠다!
이름, 지어줄게. 달이 하나 숨은 곳에서 왔댔지? 그걸 따서… 내가 주는 선물!
+
생일 축하해.
은월.
+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미래가 현재가 되었고,
넌 언제야? 물음에 그저 고개를 저었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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