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one day 6 (After all over)
메이플력 xxx년, x일. 546번째 기록.
리프레에서 에델슈타인까지의 여정도 길었지만 에델슈타인에서 에레브까지의 항로 역시 만만치 않았다. 처음부터 연합의 본거지로 불렀다면 차라리 더 가까웠을 것을, 부러 이 세계를 빙 돌게 하다니. 말 몇 마디로 부리는 입장에서야 큰 문제가 아니지 직접 움직이는 이쪽에서는 꽤 고역이었다.
물론 여행 자체가 고되진 않았다. 과거에도 수 차례 시공석이나 게이트를 이용하지 않고 대륙 사이를 오간 경험이 있으니까.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은, 이번에는 동행이 있다는 것이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기계음이 흐르는 모빌수트와 푸르스름한 페이스 마크. 제논이라고 이름을 밝힌 그는 전 레지스탕스의 일원이었다.
레지스탕스는 블랙윙의 몰락 이후에도 이름을 내리지 않았고, 전 군단장 스우를 물리치고 난 후 노선이 단순한 지하운동에서 복지를 비롯한 온건적 활동으로 변경되었다. 연합에서 통과된 안건들 대부분을 앞장서서 행하며, 본인들도 새로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행위에 보람을 느끼고 있노라고 했다. 그만큼 교류가 활발하다는 소리였다.
인체 곳곳을 개조한 흔적이 보이는 소년… 아니, 청년은 그 ‘교류’의 일환으로 출장을 나간다고 했다. 정말 본인에게 용무가 있어서 나섰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와는 지난 사흘간 정말 필요한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소통이 없었다. 서먹하지만 거리를 줄이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실질적인 감시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굳이 붙이지 않아도 어디 도망가거나 하지 않는데. 지난 두 달 에델슈타인에서 얌전히 지내던 모습만으로 신뢰가 쌓이기엔 역시 얄팍했나.
몇 년 전까지 비행의 중심지로 북적하던 오르비스 정거장은 소형 비행기와 마법의 발달로 인적이 잦아든 모습이었다. 이용객이 줄어 밤낮으로 2회만 운영한다는 비행선은 다행히 이곳에 도착한 직후까지 표를 판매하고 있었다. 출발 시간은 1시간 뒤였다. 꽤 촉박했지만 오르비스에 용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바로 플랫폼을 옮겼다.
표를 끊은 제논은 잠시 사라졌다가 출발 직전에 배에 올라탔다. 품에 무언가를 한 아름 안고 있어 무심코 시선을 던졌다. 작은 과일과 약병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가 오렌지를 하나 들어 내게 건넸다. 받아들면서도 의아함을 내비치자, “ 막 따서 신선한 거래요. ” 하며 자신은 샛노란 레몬을 집어 손 안에 굴렸다.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만. 뜬금없어도 호의를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고마움을 표했다. 이후 레몬을 크게 베어물었다가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에 먹어본 적이 없냐고 물었더니 과일 자체를 맛보는 건 처음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광산도시라고는 해도 보급물자가 부족하진 않을 텐데 과일이 그렇게나 귀한가? 에델슈타인에서의 지난날을 떠올려보아도 이해가 가지 않아 그저 사정이 있나보다, 흘러넘겼다.
손바닥만한 오렌지 하나로 물꼬를 튼 대화는 에레브에 도착하기까지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
메이플력 xxx년, x일. 549번째 기록.
하늘나루에 비행선이 정박했다. 해가 저물고 있어 여제를 독대하는 것은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섬이 크지 않아 외지인이 머물 만한 곳이 마땅히 없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야 풀숲에서 노숙해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그 말을 들은 안내원이 우리를 몰상식한 사람들로 만들 작정이냐고 말렸다. 결국 기사단원들이 사용하는 숙소로 향했다. 마침 승급하여 새로운 임무지로 떠난 기사의 방을 사용하기로 했다.
메이플력 xxx년, x일. 550번째 기록.
작은 몬스터들이 종종 뛰어다니는 숲을 지나 마을로 들어섰다. 안내원이 관광객을 대하듯 이것저것 소개해주었다. 꽤 즐거워보여서, 사실 전에 한 번 온 적이 있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굳이 말을 꺼내 시기와 이유를 추궁당하는 것도 즐겁진 않으니 담아두는 게 낫겠지.
갈림길까지 따라온 제논은 기사의 전당에서 모습을 감췄다. 여제는 대면하지 않는 건가. 레지스탕스의 판단을 전하는 역할인 줄 알았더니 정말 다른 볼 일이 있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마주한 여제는 전에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기품 어린 자태와 마냥 가녀리지만은 않은 눈빛은 언젠가 팬텀이 이야기했던 우아한 미인의 묘사가 딱 들어맞았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수백 년 전 스러지고 말았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이곳, 평화로운 하늘섬에 남아있었다. 이곳에 오는 내내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 거대한 단체의 수장을 마주함에는 아무런 격정도 변화도 일지 않았다. 여제를 향해 예를 취하고 고개를 돌렸다가 냉랭한 책사와 눈이 마주쳤다. 진짜 걱정해야 하는 상대는 이쪽이군…
메이플력 xxx년, x일. 550번째 기록 이어서.
긴장할 틈도 없이 몰아붙여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연합이라고 해도 크로스 헌터 소속이라고 밝힌 것 이외에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가 아무것도 없는 나를 다그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에레브를 위시한 연합 자체에 대해서 모르쇠로 일관했다.
책사가 모노클을 잠시 내려놓은 틈을 타 숨을 돌렸다. 심리전이라는 것은 각오는 했어도 어려웠다. 그나마 이쪽이 정보에 대해서는 우위에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탈탈 털리고도 남았다. 역시 머리 굴리기는 성미에 맞지 않는다. 언젠가 타지역의 저항단체와 교섭하느라 진저리치던 리더의 고충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유리가 작게 부딪히는 소리. 새하얀 찻잔이 앞에 놓였다. 은은한 향이 산들바람에 흔들렸다.
“ 여제님, 또 직접 차를… 그 정도는 담당자에게 맡기시라고 몇 번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 하지만 고작 차 하나 마시자고 갈림길에서 부르기도 미안한걸요. 이제는 타이밍 잘 맞춰서 내릴 수 있으니까 맛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나인하트. ”
여제가 은쟁반을 든 채 살포시 웃었다. 책사는 그게 아니라며 한숨을 쉬었다. 여전한 역학관계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책사가 여제를 좌지우지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모시는 주군에게 꽤나 약했다. 그가 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마시고는,
“ 마시지 않을 작정입니까? 무려 여제께서 직접 내린 차를. ”
일갈하기에 엉겁결에 나도 잔을 들었다. 이름 모를 차는 향만큼 맛이 좋지는 않았다. 끝맛이 달긴 했지만 그뿐, 전체적으로 밍밍하고 썼다. 이런 걸 즐겨마시는 건가, 기사단의 수뇌부는. 이런 취미가 없는지라 차라리 보리차가 더 낫게 느껴졌다. 그래도 책사의 말마따나 여제가 직접 내온 차를 남길 수도 없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잔을 비웠다. 잔 아래 가라앉아있던 찻잎을 일부 삼켰는데 생각보다 고소했다. 어떻게 우리면 이런 다른 맛이 나오지? 은근한 기대로 찬 여제의 시선이 따가워 애써 웃어보였다. 다행히 조금 전의 생각이 드러나지 않았는지 여제도 밝은 미소를 돌렸다.
짧은 티타임 동안 말이 없던 책사가 내린 결론은 예상 범위 내였다. 정말 크로스 헌터로 등록되어 있는지 확증이 없지만 아니라는 증거 또한 없으니, 한동안 연합의 일을 도우라는 소리였다. 불안 요소를 지척에 두겠다는 사고가 눈에 빤히 보였지만 명분은 그쪽에 있었다.
“ 그럼 지금 당장 출발해주시지요. 비행선이 출발하기까지 이십 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
당장? 책사는 기다렸다는 듯 뒤편에서 꾸러미를 하나 꺼냈다.. 나는 이견을 내비치지 않고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숙소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어야 할 짐이 어째서 그의 손에 있었는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메이플력 xxx년, x일. 578번째 기록.
어째서 아직까지 꿈의 조각이 돌아다니고 있지?
메이플력 xxx년, x일. 582번째 기록.
작은 아이는 허름한 천쪼가리로 겨우 국부를 가린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 주위로 산재한 붉은 낙엽과 뼛조각들. 뼈가 앙상한 아이의 어깨로 로브를 벗어 덮어주고 안색을 살폈다. 동굴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더라도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선 가느다란 단숨이 흘렀다. 손바닥에 닿은 이마 역시 다른 부위와 마찬가지로 얼음장 같았다. 가늘게 눈을 뜬 아이가 한 줌의 온기에 매달리듯 손등에 코를 비볐다. 나는 두 손을 모두 들어 아이의 볼을 감쌌다. 입가에 묻어있던 붉은 부스러기가 손목에 떨어졌다.
생명의 동굴에 세워진 결계가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이미 깨진 채였을 줄이야. 마력이 극에 달한 드래곤이 폴리모프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아프리엔의 예로 알고 있었어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어린 드래곤이 형태를 변형시켰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주위를 가득 채운 몬스터의 기운을 무시하고 하필 인간의 모습을 택한 것에는 분명 자신이 이곳에 있을 적 방문했던 손님들, 의 영향이 있을 터였다. …혼테일의 알을 발견하고도 용케 손을 대지 않았다 싶더니…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은 군식구를 늘릴 생각도 여력도 없다. 그렇다고 아이를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고, 마을의 하프링들에게 맡기기엔 혼테일의 마수로 받은 고통은 아직까지 남아있어 불안했다. 걸리는 것이 많지만 지금 상황에선 연합에 넘기는 편이 가장 나았다. 급진파라면 또 몰라도, 상냥한 눈을 한 여제라면 어린 생명에게 위험한 일은 만들지 않을 테니까.
사고를 매듭짓고 책사에게 받았던 간이 통신기를 사용하기 위해 몸을 일으킬 때였다. 가만히 내 움직임을 받아들이던 아이가 손을 뻗어 옷자락을 잡았다. 그림자에 절반 가렸던 눈이 드러났다. 그 속에 담긴 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절박함이었다. 돌아볼 이유가 하등 없는 ‘타자’의 감정. 그런데도,
“ ……데리고…… ”
메마른 입을 뻐끔거리는 아이의 손을 떼지 못한 건 분명 아직까지 남아있는 미련 탓이라.
─────
*에레브를 뜨기까지 제논은 나타나지 않았다. 감시 목적도 있었지만 얘는 기사단장에게 용무가 있던 거 맞음.
*나인하트가 맡긴 일은 신수와 관련된 것. 행선지는 리프레. 인생돌고돌고
*미래의 문은 아직 열려있지만 내부의 주민 및 기사단들은 소멸되었고, 있는 건 배경과 몬스터뿐.
*생명의 동굴 결계가 깨진 건 은월탓이 아님.
이거 처음 썼던 게 히오메도 나오기 전이라 고민했지만 애초에 세밀한 설정 짜고 시작한 글이 아니었으므로 막나간다! (.
나인하트와 제논 시점도 있어야하는데 과연 이어질지는...
덧붙여 제논 대신 데몬도 고려해보았지만 너무 뜬금없어서 각하했다는 뒷이야기가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