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업 11
진짜 마지막...!
14.6/8
*우인장/마다나츠. exclusive selection
*오늘 연성은 이런 느낌으로 어때? 나츠메로 '떨고 있는 건 내 쪽이야' 낯설음/우울한 느낌
~0
비가 내렸다. 이른 장마였다. 꿈자리가 사나워 일찍 잠에서 깼다.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거리는 것을 야옹선생이 깨우지 않았더라면 꿈 때문에 정신이 좀먹혀들어가지 않았을까.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렴풋하게 잔상만 남은 이미지만으로도 가위에 눌린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산에서 내려와, 잠이 든 인간에게 달라붙어 악몽을 꾸게 하는 요괴가 있다고 한다. 악몽을 꾸는 인간으로부터 힘을 빼앗아간다고, 너에게 그것이 붙었던 모양이라고 야옹선생은 앞발을 혓바닥으로 정돈하며 말했다. 그것은 야옹선생이 채 삼키기도 전에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창틀 사이로 미끄러져 날아가 버렸다고 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시멘트로 된 도로 구석구석에 물웅덩이가 고였다. 되도록 보폭을 작게 해서 걸었지만 무심코 물웅덩이를 찰박 밟는 바람에 바짓단 한 쪽이 젖어버렸다. 안 그래도 피부를 감싸는 습기가 신경 쓰였는데 한 발 더해 축축한 옷단이 껄끄러운 모래와 함께 다리에 달라붙었다. 축축해.. 그제 체육이 들어서 체육복은 집에 있는데. 타누마에게라도 빌릴까 생각을 하며 다시 발걸음을 조심해 걷기 시작했다.
해가 뜬 날이면 언제나 탈수로 갓파가 쓰러져있는 나무 밑동을 지나가는 도중 문득.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장마가 시작되었으니 머리 위의 접시가 메마를 일이 당분간 없을 테지 생각하며 가볍게 넘겼다.
빗방울이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기인한 파동으로 물웅덩이가 잘게 흔들렸지만, 물안개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1
종일 내리던 비는 오후가 되면 잠시 멎을 것이라는 아침의 기상예보가 무색하게 오히려 거세졌다. 여느 때와 같이 옥상에 올라가지 못하고 교실에 자리를 잡은 니시무라와 키타모토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섞여 도시락을 꺼냈다.
당분간 교실에서 계속 먹어야겠다. 이번 장마는 어째 오래갈 것 같네..
계란지단을 젓가락으로 절반 자르며 니시무라가 투덜거렸다. 올해 날이 풀린 이후로 점심을 먹고 나면 옥상 바닥에 늘어져 일광욕과 오수를 함께 즐기던 니시무라에게 장마는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어라? 나츠메는?
담임 선생님이 당번에게 짐 드는 심부름을 시키시는 바람에 뒤늦게 점심 대열에 합류한 타누마가 교실을 슥 둘러보더니 물었다. 비 때문에 교실은 평소보다 북적거렸다.
속이 별로 안 좋은가 봐. 오늘 아침부터 비실거리더니..
양호실 간다고 좀 전에 나갔는데 못 만났어?
아, 응. 반대 방향으로 갔나 보네.
타누마는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오늘의 도시락은 담백한 장아찌 주먹밥이었다. 여느 때처럼 매점식을 택할까 생각했지만 전날 밤부터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에 이른 아침부터 눈이 떠져 부엌에 들어섰던 것이다. 적어도 한 사람과는 나누어먹게 될 거라 생각해서 여러 개를 싸왔는데, 정작 그 한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별 수 없었다. 그러나 옷, 나도 하나, 하며 주먹밥 하나를 집어가는 니시무라를 보니 잔반이 남진 않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많이 안 좋아 보였어?
적어도 오후 수업은 다 공식적으로 땡땡이칠 수 있을 것 같더라. 감기라도 걸렸나? 근데 안색이 진짜 새파랗게 질려서.
나츠메, 큰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걱정을 담아 내뱉은 말은 넉살 좋은 두 사람 사이에서 금세 증발해버렸다. 점심 먹고 양호실에 찾아가봐야겠다. 니시무라나 키타모토와 달리 나츠메의 사정을 알고 있는 타누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밥을 베어물었다. 도시락을 깨끗하게 비우고 예비 종이 울리기 전에 교실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하필 교실문을 나서자마자 무언가 시킬 것이 잔뜩 있어 보이는 담임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그 생각이 실현되지는 못 했다.
~2
벽에 몸을 기대다시피하며 양호실에 도착했지만 문이 열려있는 것과 달리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깐 나가셨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은 다시 지끈거리는 통증에 지워져버렸다. 나츠메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 커튼을 걷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도저히 더는 서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질 나쁜 여름 감기를 짐작해보았지만, 먹은 것도 없는데 체했을 리가 없고. 하지만 이마를 짚어봐도 열이 오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뱉는 숨이 꽁꽁 얼어붙는 것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역시 아침의 요괴(로 추정되는 그림자) 탓일까. 속이 메스껍게 뒤집힌 것처럼 토기가 일순 몰려왔다.
기분 나빠. 입 밖으로 뱉지도 못하고 힘없이 속으로 말을 삼켰다. 아무래도 약이라도 한 알 받아먹고 교실로 돌아가려던 생각은 집어넣는 게 좋을 것 같다. 다음 시간이 뭐였더라, 니시무라와 키타모토에게 말은 하고 나왔지만. 영어였는지 고전이었는지 시간표가 가물가물하게 머릿속에서 허물어졌다.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깨워주시겠지. 점점 고약해지는 통증 속에 나츠메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렸다. 어둠에 둘러싸이자 얼마간 통증에만 집중되던 신경이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3
'쟨 이상해.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뭐가 있다고 그러더라'
'위는 다락방인데 천장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둥, 모르는 사람이 옆에 앉아있다는 둥 정신이 이상한 거 아냐?'
'가까이하지 말렴. 저런 아이와 친하게 지내서 좋을 게 없단다'
'뭐야, 가까이 오지 마, 이 거짓말쟁이야!'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보다 먼저 열린 귀로 쑥덕거리는 소리가 파고들었다. 나츠메는 우주에 떠있는 것처럼 허공에 둥실 부유하며 두 눈을 깜빡였다. 현실에서의 고통이 부재하는 대신 이성이 촉을 세우고 있었다. 꿈이구나. 그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피부에 와 닿을 리 없는 한기가 날개를 펼쳐 감싸 안는 바람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고개를 돌리면 새로운 이미지가 브라운관에 비치는 영사기처럼 덜그덕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오른쪽을 보아도 왼쪽을 보아도 뒤를 돌아보아도 마찬가지라서 눈을 둘 곳이 없었다. 이런 꿈은 정말 싫다. 얼른 깨버리고 싶어. 좀 전까지 전신을 지배하던 고통이 무의미해지자 그새 얄팍한 비교를 하며 이성이 호소했다. 하지만 깨고 싶다고 깨어지는 악몽이라면 악몽이라 부르지도 않는다. 이미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눈가가 스물스물 젖어오는 것 같아, 나츠메는 침대에 누웠을 때처럼 몸을 웅크리며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눈마저 질끈 감고 어서 이 꿈에서 깨길 바랐다.
'…해?'
이미지가 방출하는 것과는 다른 부드러운 소리가 잔영을 남겼다. 귀를 막았는데도 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보이지 않았으면 하니? 너를 슬프게 만드는 것들, 그 원인을 모두 네 앞에서 사라지게 하면 넌 기뻐할까? 행복해할까?'
어쩌면 어린 날의 자신이, 어쩌면 어린 날의 치기와 눈물이, 그곳에 있었다.
여자는 상냥하게 속삭였다. 호의를 담은 물음이었다. 언젠가의 기억 속에 나츠메를 속였던 그녀는 또다시 울고 싶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유대를 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안정을 담고 있었다. 여자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 부드럽게 종용했다. 어느새 귀에서 뗀 손가락이 망연하게 떨어졌다. 선택이라니. 보이는 것은 선택이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당연하게 이형의 것이 보였고 보이는 것은 나츠메의 의사가 아니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나츠메의 선택을 기다렸다. 하지만 나츠메는 어째서인지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망설임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바랐던 것처럼 가볍게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주억일 수가 없었다.
얼마나 멈추어 있었을까.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다만 상냥함 대신 음습하고 축축한 나무 냄새가 그득 들어찬 목소리였다.
'너의 바람을 들어줄게.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테니…'
여자의 거죽을 뒤집어쓴 그것은 혀를 날름거렸다.
잠깐 몸을 뒤로 빼는가 싶더니 이내 혀를 길게 빼며 다가왔다. 스스로가 선택한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망연자실함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으로 둘러싸여 나츠메는 도망가지 못했다. 그것이 나츠메의 발치부터 그림자처럼 칭칭 감아올라올 때까지도 나츠메는 움직이지 않았다. 완전히 포기한 것처럼 그저 눈을 감았다. 꿈이든 현실이든 상관없다 생각하며.
~4
수업이 모두 끝나고 모두가 가방을 들고 하교하는 시간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식은땀에 젖은 교복 깃을 몇 번 펄럭이며 멍하니 창밖에 계속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가, 늦으면 걱정하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교실에는 청소하는 아이들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키타모토는 오늘 일이 있다고 했던가. 니시무라도 함께 일찍 파한 모양이었다. 나츠메는 짐을 추스르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빗방울은 여전히 복도의 닫힌 창을 때리고 있었다.
언제나의 거리를 지나고 주택가 초입으로 들어선 나츠메는 등 뒤를 강타하는 한기에 우뚝 멈추어 섰다. 겪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이건,
그 힘을, 내놔라아──!
빗방울을 퉁기며 달려드는 것에 밀쳐졌다. 우산은 나동그라지고 나츠메는 비에 젖은 땅바닥에 넘어졌다. 다행히 두 손을 앞으로 뻗은 덕에 얼굴이 진흙탕에 처박히는 꼴은 면했지만 무릎 아래는 물웅덩이에 담겼고 등 뒤는 빗줄기에 젖어들었다. 덜그덕거리는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들었지만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쏴아아 빗소리만 사위에 가득했다. 그러나 으스스한 목소리는 여전히 근처에서 흐으, 흐으 떨며 다시 달려들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어째서 보이지 않는 거야? 나츠메는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공포보다는 당혹감이 컸다. 고양이처럼 땅을 짚은 자세 그대로 굳은 먹잇감을 놓칠 세라, 다시 한 번 소리가 달려들었다. 이번엔 공기를 가르는 쇳소리와 함께였다.
잡았다──악
하지만 소리는 나츠메에게 닿지 못하고 뚝 끊겨버렸다. 바람과 같이 달려든 방해자 때문이었다. 나츠메게 있어 구원자인 커다란 짐승은 날카로운 이빨로 위협을 짓이겨버렸다.
뭐 하는 거냐, 나츠메. 한심하게 이런 조무래기한테 당하고.
중후한 목소리가 저 높이서 들려왔다. 나츠메가 미동 없이 고개를 들지 않자 짐승은 으르렁거리며 나츠메의 곁으로 훌쩍 뛰어왔다. 한 번의 도약으로 일어난 바람이 빗줄기 사이로 휑하니 불었다. 그 바람이 분명 뺨에 닿아서, 그런데도 시선의 사각지대 위쪽에는 흰 털은커녕 검은 허공뿐이어서.
짐승은 나츠메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쳇 혀를 차며 그를 집어들기 위해 입을 벌렸다.
탁, 나츠메가 손으로 밀치지만 않았더라면 그를 데리고 집까지 단숨에 날아갔을 터였다.
무언가가 밀쳐지는 감촉이 손끝에 남아있었다. 그런데도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의 공기가 파르르 떨리면서 묵직한 바람이 그 자리를 감싸고 있는데도,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두운 물웅덩이만이 수면을 퉁기며 떨렸다.
선생? ....마다라?
분명 그 자리에 있는데도, 그 자리에 없었다. 언젠가 맛본 적 있는 경험.
'야옹선생'
'거기 있어?'
'야옹선생…'
나츠메.
설마 보이지 않는 건가. 그제야 짐승, 마다라는 나츠메의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읽어냈다. 필름처럼 팟 기억을 뒤엎으니 원흉으로 짚이는 요괴가 떠올랐다. 나츠메의 요력이야 방대하니 고작 그런 요괴 하나에게 꿈을 붙잡힌 것만으로 고갈될 정도가 아님을 알기에 부러 쫓아가지 않고 나츠메의 옆을 지켰는데, 이제 보니 뒤쫓아가 집어삼킬 것을 그랬다. 그래도 시각을 빼앗겼을 뿐 그 외의 감각은 무사한 듯했다. 어쩌면 돌아오고 있거나. 마다라는 재차 나츠메를 불렀다.
익숙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동아줄과 같았다. 나츠메는 바람이 가라앉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비에 젖어 가라앉은 털뭉치의 감촉이 느껴졌다.
걱정 마라. 완전히 힘을 빼앗긴 것도 아니고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곧 시각도 원래대로 돌아올 거다.
선생…
나츠메는 한기로 파리해진 입술을 달싹였다.
~5
흐릿하게나마 허공에 형태가 비쳤다. 희끄무레한 짐승의 그림자였다.
알았어, 선생.
떨고 있는 건 내 쪽이야. 물기 섞인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마다라는 언제나 자랑하던 결 좋은 털이 축축하게 젖어가는데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먼 하늘의 검은 구름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그의 본체에 접근을 허용하는 하나뿐인 인간의 어깨에 예민한 코 끝을 올릴 뿐이었다.
14.5/29
*오늘 연성은 이런 느낌으로 어때? ( http://kr.shindanmaker.com/360660 )
*'100년만이네, 잘 지냈어?' 시든장미/부드러운 느낌
*디오죠나인지 죠나디오인지 둘 다 이름도 나오지 않았지만(...)
3부 초반에 관에서 막 나왔을 때, 100년 동안 스스로를 3인칭으로 인식해온 디오님 시점.
어둠 속에서 문득 시야가 트였다. 흐름이 없는 물결 속에 잠들어있었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그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빛처럼 물든 채, 이쪽을 향해 손을 내미는 모습에 아아, 한탄이 섞인 숨을 깊게 내뱉으며 커다란 손을 붙잡았다. 그 손은 원래부터 밀착되어 있던 것처럼 착 들어맞았다. 신기하게도, 단단하게 죄어오는 손아귀의 감촉은 부드러운 한편 뜨거웠다. 이것은 꿈이 아닌가 하고 그는 한구석으로 생각했다.
죽음 후에도 길이 있다면 지옥으로 이어져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빛이 서늘하게 퍼져나오는 걸 보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애초에 지옥이나 천국은 세간의 인식으로 나누어진 개념이니까.
깊게 잠들어있던 나날.
낮과 밤의 경계도, 빛과 어둠의 구분도 모조리 뭉뚱그려진 풍경. 소리는 깊이에 먹혀버리고 숨 막히는 수압이 사방을 죄여오는 환상. 고여있는 그 물속에서, 그는 무슨 꿈을 꾸었던가. 익숙해지리라 했던 오만한 과거가 망막에 닿지 못하고 스러지는 형상을 수 십, 수 백번 반복해서 지켜보았다. 불같이 내뱉던 열정도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갈망도 모두 어디론가 가라앉아버렸다. 이것은 현실인가 하고 한구석으로 생각했다.
그런 나날 속에서, 너는 손을 뻗어왔다. 손바닥 정중앙을 꿰뚫고 피어오른 장미가 생생했다. 손을 뻗으면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고 너는 손을 뻗었다. 상냥하고 악의없는 미소. 언제 적 의 기억인지 아득한 파편이 아스라이 눈앞을 스쳤다.
'100년만이네, 잘 지냈어?'
아아. 소리없는 탄성을 내뱉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빛은 오간 데 없이, 형상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덜컹, 움직임이 잠을 깨웠다. 다시금 빛인지 불꽃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망막을 찔러와, 그것이 고통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눈가에 고였다. 너의 손을 잡는 대신.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팔을 휘둘렀고 손에 잡힌 머리통에 힘을 가했다. 그는 두 손을 가득 적시는 신선한 피를 입에 머금었다. 너의 환상이 닿은 피는 시원한 장미향이 났다. 바닥으로 철퍼덕 소리를 내며 고깃덩어리가 추락했다. 공포로 뒤덮인 흩뿌연 눈동자에 그가 비치고─ 네가 비쳤다. 다만 너의 손을 관통한 식물의 줄기는 힘을 잃고 축 늘어져있었다.
너는 피지 않는 장미.
'100년만이네, 잘 지냈어?'
그(나)는 새로이 인사를 했다.
'100년만이지. 이제 안녕.'
14.6/3
*죠죠/오라부녀. 어린 죠린을 써버렸을 뿐
*세상에서 제일 긴 3분이라고 생각했어' 를 쓸 생각이었는데 쓰다보니 엇나가버린'_'..
그날은 드물게도 부친이 일주일이라는 휴가와 함께 돌아온 날이었다. 5살의 어린 죠린은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를 처음에는 약간 낯설게 올려다보았지만, 이내 그의 옆으로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다가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긋 웃었다. 어린아이의 친화력이란 대단하군, 트레이드 마크인 모자 챙을 눌러쓰며 쿠죠 죠타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마을에서는 때마침 축제가 한창이었다. 아내는 선약이 있다며 무뚝뚝한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배려를 면전에서 거부할 만큼 냉혈한이 아니었기에, 죠타로는 어린 딸을 품에 안고 대문을 나섰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나왔는데 아이는 뱃속에 블랙홀이라도 키우고 있는 것인지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며 손가락으로 노점을 가리켰다. 군것질은 몸에 좋지 않지만 이 정도 어리광은 괜찮겠지. 죠린이 가리킨 것들을 하나 둘 손에 쥐어주니 왼손에는 초콜릿 바나나, 오른손은 구운 오징어 봉지와 끈끈이공이 들리고 입에는 센베가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다. 아내가 보았다면 너무 어리광 받아주는 것 아니냐며 고개를 저을 모양새였지만 본인이 즐거워하니 되었나,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에 대해서도 철저하기로 유명한 남자는 하나뿐인 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밤의 거리는 활발해졌다. 점점 늘어나는 인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아이가 들고 있던 봉지를 대신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무시할까 생각했지만 '휴가'라고 내걸었는데도 개인 휴대폰으로 연락이 왔다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 분명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죠타로는 잠시 인파를 거슬러올라갔다. 그는 늘어서 있는 노점 사이의 공간로 몸을 빼내고 죠린에게 떨어지지 말라는 당부를 전한 뒤 수신에 응했다.
죠린은 통화하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다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색 등불이 하나둘씩 켜지면서 밤이 설 자리를 잃고 달아나고 있었다. 여러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동안, 토끼탈을 쓴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죠린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특이하게도 분홍색이 아니라 초록색 토끼였다. 거기에 유난히 복스러운 꼬리털이 살랑거리는데─ 앗차 하는 순간 들고 있던 끈끈이공이 그 꼬리에 달라붙어버렸다. 어, 잠깐마안. 어린 여자아이는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멀어지는 끈끈이공을 따라갔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조금씩 멀어져가는 끈끈이공을 마침내 낚아채고 휴 한숨을 내쉬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죠린은 자신이 아버지와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홀로 서있는 것을 알았다. 황급히 올려다보았지만 높이 떠있는 얼굴들은 모르는 인상뿐이었다. 익숙한 소란스러움이 하나같이 낯설었다. 머뭇거리며 죠린은 뒷걸음질 쳤다. 죠린은 끈끈이공을 쫓는 사이 저도 모르게 지나온 골목길로 들어갔다.
밤은 어둡고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길은 길고 넓었다. 언젠가 엄마가 읽어준 동화에 나왔던, 고래의 뱃속에 갇힌 소년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 갇힌 소년에게 무서운 괴물이 깊은 바다의 차가운 물을 가득 적시고 스물스물 다가오는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쳤다. 등 뒤에서 무언가가 쫓아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죠린은 저 앞에 보이는 빛을 향해 달음박질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빛에 다다랐을 때, 기대와는 달리 낯선 거리의 풍경이 펼쳐져 죠린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현란한 네온사인이 가로등 불빛을 가로막고 온 사방에서 반짝거렸다. 온갖 소리가 뒤섞인 축제의 어두운 열기가 빙글빙글 돌고 돈다. 가지각색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눈앞을 지나갔다. 가장행렬에 환호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혼자인 죠린에게 결코 귀엽지 않은 가면을 쓴 사람들은 두려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문득 어떤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손을 뻗어왔다. 홀로 아이가 떨어져 있으니 걱정을 담아 내민 친절이었을 테지만, 갈색 피부에 새빨갛게 칠해진 매니큐어는 동화 속 늑대의 발톱만 같아서. 아이는 손을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 없이 어디론가로, 그저 낯설고 무서운 이 혼란 속에서 벗어나고자.
얼마나 두 팔과 다리를 교차시켰을까, 누군가가 아이의 앞을 막아섰다. 죠린은 팔을 붙잡는 누군가를 뿌리치려 들었다. 겨우겨우 억누르고 있는 울음이 거의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귓가에 들려오지 않았다면 끝내 악을 쓰고 말았을 거다.
죠린.
아빠…?
낮고 단단한 목소리. 고개를 든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죠타로는 아이를 찾는 동안 조금 거칠어진 호흡을 삼키면서 죠린을 안아올렸다. 죠린은 커다란 품 안에 그렁그렁 매단 눈물을 파묻었다. 우, 무서웠어어… 뭉개진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꼭 붙잡고 있던 긴장의 끈이 풀린 탓에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이런 이런. 곤란한 듯 말버릇을 흘리면서도 안도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죠타로는 자잘하게 떨리는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14.7/27
*드길2. 솔직히 엔딩이 너무 해피해서
*아버지!!!! 하는 그 순간에 영화가 끝났어야 한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정말로 히컵 네가 아무 일도 없던 이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아아아 하는 삐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글(..)
*엔딩 크레딧 올라간 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스포 있습니다.
큰 위기를 극복해내고 사로잡힌 드래곤들 모두 무사히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왔지만, 울퉁불퉁한 암석 사이사이를 메꾼 얼음과 부서진 집의 흔적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복구해야하는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혹여 또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는(그럴 가능성은 없어보였지만) 드라고에 대비해 방책을 짜는 등 바쁜 나날은 한 달 내내 이어졌다. 족장이라는 건 결코 허울 좋은 책임감만으로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는 왜 위대한 바이킹들이 어째서 하나같이 큰 체구에 강철같은 체력을 자랑하는지 몸소 깨달았다! 아버지만큼은 아니어도 대장장이 보조일로 쌓은 뚝심과 그의 드래곤과 여기저기 나돌아다니며 쌓은 체력 덕분에, 히컵은 무사히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한눈을 팔 틈도 없이 꽉 차있는 스케쥴이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
여유가 생기자 떠오르는 것은 역시나 먼 곳으로 떠나보낸 그의 아버지, 전 족장 스토이크.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히컵과 고버, 아스트리드 등 그곳에 있던 이들만이 그의 육신을 배와 함께 바다 너머로 떠나보냈다. 어느 정도 마을의 얼음이 녹고 몇몇 집을 제외하면 대부분 증축이 시작되거나 한창인 상황이었다. 비로소 한숨을 돌린 히컵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성대한 저녁을 대접했고, 그 자리에서 전 족장의 공로와 죽음을 기리는 연사가 이어졌다.
비록 족장이 되었고 앞으로 마을과 주민들을 책임져야하는 몸이라고는 하나 특유의 허술하고 숫기 없는 어투가 어딜 가지 않았다. 가볍게 운을 띄어 이따금 웃음을 유발하는 히컵의 연사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진심이 듬뿍 담긴 말에 사람들은 전 족장을 떠올리며 잔을 벌컥 들이키거나 코를 훌쩍였고, 마지막에는 그의 영혼이 무사히 잠들었기를 빌었다. 식사에서 이어진 성대한 분위기는 축제처럼 밤까지 이어졌다. 몇몇 어린아이들과 그 드래곤들을 슬슬 문 밖으로 밀어보내며 히컵은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밤의 장막은 거친 땅과 달리 부드럽게 별이 수놓고 있었다. 히컵은 마을 뒤켠의 언덕에 털썩 주저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 샌가 사라진 파트너를 따라 나온 검은 몸뚱아리가 소리없이 다가와 히컵의 팔을 코 끝으로 툭 쳤다. 투슬리스는 커다란 눈을 말똥말똥 뜨며 히컵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 있냐는듯 의아해하면서도 일면에 담긴 걱정에 히컵은 투슬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좀더 안에 있지, '알파'님은 모든 드래곤을 통제해야 하잖아. 새로운 무리들도 있고."
흥, 뭐 그까짓 걸 가지고, 이미 다 외웠는 걸─ 또는 그런 거 알 게 뭐야─ 라는 표정으로 시치미를 뚝 떼는 걸 보니 대충 알 것도 같이 히컵이 숨을 죽이고 웃었다.
"어린 드래곤들 피해왔구나? 하긴 천하의 '알파'님에게도 천적은 있지."
히컵의 말에 투슬리스가 크르릉 목을 긁으며 울었다. 호기심이 많고 두려울 것 없는 어린 드래곤에게 어지간히 시달린 모양이었다. 히컵은 다시 웃으면서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심술부리는 투슬리스의 목을 긁으며 달랬다. 익숙한 손놀림이 시원하게 약한 부분을 긁어주자 투슬리스는 끄응 만족스런 소리를 내면서 목을 길게 뻗고 히컵의 옆에 앉았다.
한적한 밤바람이 언덕에 풀의 물결을 일으키며 바다로 뻗어나갔다. 그 길목에 앉은 두 그림자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이따금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 긴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릴 뿐이었다. 몇 번인가 히컵이 입술을 떼었다 다물었고, 밤하늘의 별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긴 망설임 끝에 소년과 어른 사이에 머무른 목소리가 조용한 바람을 갈랐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었어. 내 말은, 불 타는 배 위에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
더듬더듬 단어를 잇다가 히컵은 드물게 말을 멈추었다. 언제나 속마음을 투슬리스에게 터놓는 진솔함이 가슴 한 켠에 콱 막힌 것처럼 단단하게 내려앉았다. 히컵은 말을 골랐다. 고르고 골랐지만 가장 나은 것도 아예 하지 않는 것만 못해, 입술을 한 번 달싹였다가 다시 굳게 다물었다. 히컵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투슬리스가 끼잉, 약한 소리를 내며 작은 날짐승처럼 귀를 축 늘어뜨렸다. 히컵은 차마 그 모습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투슬리스는 히컵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드래곤이자 가족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 막히는 것이 있다면 차라리 이 순간에 털어놓고 해결하는 편이 좋다는 것을 히컵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중한 그의 친구(bud)에게 그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분명히 아버지는 투슬리스에 의해 죽었다. 그것이 비록 드라고와 그 알파의 소행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투슬리스의 의사가 아니었다는 것도, 그러한 상황까지 안일하게 이상을 표방한 히컵 스스로의 잘못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머릿속에서 이성이 냉정하게 정리한 것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달랐다.
앞으로 몇 번이고, 먹잇감을 눈 앞에 둔 맹수가 침을 흘리듯, 투슬리스의 푸른 진공을 볼 때마다 그 때를 떠올리겠지. 가늘고 날카롭게 변한 홍채, 등의 비늘을 곧추세우고 드러내는 적대감, 크게 벌린 입 속에서 연기와 함께 피어오르는 푸르고 새하얀 진공파. 되풀이되는 상념에 히컵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에도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미안. 미안, 투슬리스."
연신 짧은 사과를 입에 담으면서 히컵은 매끈한 거죽에 얼굴을 부볐다.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그 말 한 마디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딘가 시무룩한 투슬리스가 날개를 살짝 펴 히컵을 감쌌다.
*물론 언젠가는 그것을 극복하겠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ㅠㅠㅠ 정말 히컵이 아무렇지도 않을까 해서 써봤어요... 투슬리스도 시무룩 히컵도 시무룩 나도 시무룩'm'
14.10/23
*탐정의 왕
*세일절망 비스무리한 걸 쓰려고 했었는데 쓰고보니 컾링은 무슨 그냥 +로 쓰기도 민망한 찌끄레기
*[불꽃심장-환각의 춤]을 들으며
위험하다. 아무리 정보를 그러모아도 똑같은 결론이 나온다. 절망은 서태혁의 마지노선, 최후의 보루. 한심하기 짝이 없는 본체라도 제가 태어난 근본이기에 지킬 수 밖에 없다.
마지노선, 인가요? 당신의 자리에 내가 선다면, '서태혁'으로의 의태는 더욱 쉬워지겠네요.
?!
시작의 방에서 홀로그램을 마주하는 서태혁의 행보를 속에서 지켜보며 왠지 모를 불안감에 생각에 잠겨 있던 절망에게, 선뜻한 목소리가 날아든다. 드물게도 어깨를 움찔한 절망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전의 방향이 아닌 또다른 쪽에서 재차 울렸다.
이번 서태혁의 행보는 기대대로에요. 하지만 속에 이런 걸 키우고 있다니, 정상적인 인간으로는 볼 수 없군요. 앞으로 조금만 더 수정한다면 내가 바라는 그림이 나오겠죠. 익센트릭!
말버릇처럼 따라붙는 영어의 뉘앙스가 듣는 쪽에서는 전혀 좋지가 않다. 서태혁에게라면 언제나처럼 껄렁하게 빈정거렸을 절망은, 그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심상 속임에도 불구하고 사슬에라도 묶인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하? 뭐냐 이게, 이 속에서 이따위 강제력을 가진다고…?!
상자 안에서 지워져주세요, '절망'씨?
내가 구상하는 인간상에 이중인격마냥 또다른 인격이 존재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없어야 하니까요. 아무렇지도 않게 '소멸'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향해, 절망이 기릭 목을 돌렸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그 자신. 어리벙벙한 '서태혁'도 자기혐오로 일그러진 '절망'도 아닌, 어둠을 몸에 두른 '권세일'이었다.
의식 너머로 서태혁의 선택지가 이어지고 있었고, 그가 마주한 홀로그램은 여전히 벽면에 사람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가. 이것도 예상범위 안이라는 건가.
서서히 절망의 몸이 발끝부터 사라져간다. 한번에 없어지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먹혀들어가는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그야말로 악취미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서태혁. 이 멍청한… 자식… 그래서 말렸는데, 이따위 진실과 마주해서 대체 뭘 어쩌겠다고……
어둠 속에서 권세일은 사물을 마주하듯 무감각한 눈으로 의태에 먹혀가는 절망을 내려다본다. 분위기는 달라도 저와 판박이인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소리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존재가 사라져가는 와중에 목소리마저 박탈된 인격으로부터 신경을 돌려 권세일이 마주한 것은 심상이라는 상자의 밖에 위치한 이번 차례 그가 기획한 인격. 익센트릭,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네요. 하하. 야금야금 절망을 먹어치우며 들어오는 이번 차례의 정보들을 고르며 권세일은 소리내어 웃었다. 비록 그 웃음 속에서 희열은 커녕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다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