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월른 스터디/ 후회
*독재자 검마x노예 은월 + 반란군 영웅즈
*나중에 이어쓸지도 모르지만 기약없다
*급하게 쓰다가 또 산으로 가는 바람에 생략이 많아오 용서해주세오 영웅즈 괜히넣었어
Catastrophe.
짙은 안개가 유영해 자칫 한눈을 팔았다간 진법에 갇힌 것처럼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일 거리. 인구가 만에 육박하던 거대한 도시는 하루아침에 그 활기를 잃고 무덤으로 전락했다. 군중은 사라졌고 건물은 부서지거나 바스러진 채 그 조각이 거리를 굴러다녔다. 남은 것이라곤 시장이 시민을 대표하고 지킬 의무를 져버린 순간부터 도시를 에워싼 뿌연 안개와, 인간보다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작고 더러운 생명들이 다였다.
왕의 사자는 도시에 잔존하는 가장 높은 종탑의 위에서 말없이 그 모습을 내려보았다. 죽음이 휩쓸고 지나간 거리에는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이 땅의 지배자에게 거역하는 자들에게 본보기를. 군주의 충실한 신하들이 멋대로 행한 압제에 도시가 하나 죽음에 이르렀다. 하지마 그에 따른 처벌은 없었다. 애당초 그런 작은 것들은 군주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언제나 무료한 지배자와 그에게 거두어진 대륙. 예술의 도시니 뭐니 해도 그, 검은 마법사에게는 티끌만한 가치도 되지 못했다.
세 번째 귀족 아카이럼의 보고에도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래. 짧은 한 마디를 던지고 다시 왕좌의 팔걸이에 턱을 괸 채 신하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머나먼 경지에 잠겼다. 자신들의 충성심이 치하받지 못했는데도 귀족들은 저마다 긍지에 찬 얼굴로 계단 아래 섰다. 그 날 의제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도에서 지워진 도시는 그렇게 잊혀졌다.
단 한 사람, 왕좌 뒤에 그림자처럼 녹아있던 남자만이 마지막으로 도시의 이름을 읊조렸을 뿐.
전날 전해들은 소식은 가감이 없었다. 예술의 도시는 더는 없었다. 무성한 잔해. 순식간에 지워졌을 사람들. 무거운 안타까움이 용케 남아있는 양심을 때렸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눈앞의 광경을 기억하는 것 이외엔.
남자는 한참이나 도시를 내려다보다 몸을 돌렸다. 그가 사라진 뒤 천천히 몸을 불리던 안개는 끝끝내 종탑 꼭대기마저 집어삼켰다.
Omen.
Impression. (Freud with Heroz)
야시장이 열려서 한 번 둘러나 볼까 하고 인파에 끼어들었어. 생각보다 훨씬 붐볐는데 노상도 많아서 정말 사람 몰린 몇 군데를 제외하곤 다닐 만하더라. 이런저런 것들을 파는데 군것질거리부터 생활용품에 마도구까지 다양했어. 아이들 생각이 나서 병 하나에 가득 담긴 사탕과 과일을 튀겨 말린 것따위를 사고, 너희들 주려고 잡화점을 돌았지. 그러다 길거리에 양탄자를 깔고 자질구레한 공예품을 늘어놓은 걸 발견했어. 크기가 점점 작아지는 마트료시카, 나뭇잎인지 곤충인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흩어진 무언가가 들어있는 호박, 아무런 무늬도 없는 은반지, 천장에 달아놓는 천칭같은 것들. 장인이 만든 걸 모아왔다고 장사치가 떠벌리는 걸 한 귀로 듣고 적당히 맞장구치면서 휘 둘러보았어. 기왕이면 너무 화려하지 않고 튼튼한 게 좋다 하면서. 그러다 하늘색 실과 검은 털로 엮어만든 팔찌를 보았어. 정확히는 미산가라고 하던가? 그 옆에 흰색과 검은색, 노란색과 보라색, 녹색, 하늘색과 남색의 조합 등으로 여럿 있어서 너희 이미지에 맞는 색을 하나씩 골랐지. 내 것까지 다섯. 그러자 상인 아저씨가 하나를 서비스로 주겠다는 거야. 처음에 본 것도 제법 조합이 예뻐서 그걸로 집어들었지. 계산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어. 슬슬 해가 저물어가는 어중간한 밥시간대라 그런지 인파는 처음보다 줄어있었어. 낮에 가장 붐비던 분수대 쪽만 보고 가자, 흰 대리석으로 만든 커다란 원형 분수대에 다다르니 떠듬떠듬 앉아있는 몇몇을 제외하곤 사람이 없더라구. 물이 높은 층에서 아래로 줄줄 떨어졌어. 꼭대기에 왕관처럼 솟아있는 작은 기둥은 하늘로 물줄기를 뿜어내는 용도 같았는데 시간이 아닌지 잠잠하더라. 넓은 분수대 바닥에는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던진 동전이나 구슬같은 것들이 가라앉아 있었어. 마침 주머니에 잔돈이 남아서 꺼내들었지. 그리고 손가락을 퉁겨 던지려는데 아뿔사, 등 뒤를 툭 치고 지나가는 커플 때문에 조준이 빗나간 거야. 동전은 포물선을 그리며 분수대 가장자리로 떨어졌는데, 하필 거기에 사람이 하나 앉아있었어. 긴 흑발을 늘어뜨린 남자였는데, (" 여자가 아니고? ") 그야 여자치곤 체격이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남성용 의복을 입고 있었고. 여하튼 그 사람 얼굴로 핑그르 떨어지는 걸 보고 황급히 손을 뻗었어. 물론 늦었지. 거리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분명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가볍게 동전을 잡았어. 군더더기 없는 손놀림이 꼭 팬텀 네가 카드마술 보일 때 비슷한 느낌? 그리고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어. 꽤 긴 앞머리가 들리니까 어두운 자색 눈동자가 물빛에 반사되어 보이는데, 하… (잠시 그때를 회상하듯 이야기를 멈춘다) 얼마 전에 광산 잡입갔다가 캐낸 광석 있잖아. 자수정에 붙어있던. 어쨌든 일단 사과는 해야겠다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는데 표정이 없었어. 무생물을 마주하는 느낌? 마주하는 이가 감히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였지. 어쩌면 나도 그 순간 정신이 당황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마비되어 있었는지도 몰라. 남자가 동전을 내밀었는데 그걸 받으려 손을 내밀긴 커녕 덥썩. 붙잡아버렸지 뭐야. (하? 터져나오는 한 음절에 시선이 집중된다. 조용히 해 좀도둑. 뭐, 싸울래? 아니 그렇지만 네가 그랬다고? 그래서 반응이 어땠는데, 그 사람은?) 화들짝 놀라는 것도 바로 내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얌전히 잡혀있었어. 아무렇지도 않아보였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좀 당황했던 걸지도. (" 그래서? 그걸로 끝? ") 아니. 외쳤지 뭐. (" 뭐라고? ") 오늘 저녁 시간 되십니까! 하고.
" 하? "
" 하? "
" 하아아아?! "
" 뭐야 그 되먹지 못한 작업멘트는! "
" 아하하, 그러게. 그래도 그 사람 반응이 없다가, 한참 있다가 손을 빼내면서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라. 아, 내 손에 다시 동전을 쥐어주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버렸어. "
" 유리구두냐? "
" 아니지, 내가 보기엔 미친 놈으로 보고 자릴 뜬 거야. "
" 너무하다 메르… "
" 너무하긴 뭐가. 여자였어도 뭐야? 싶은데 남자라며. 프리드 너 그런 부류였어? "
" 그만해라, 애 상처받는다. "
" 이미 받았어… "
" 그보다 그걸 얘기하는 의도가 뭐야? 뭐 특이할 것도 없는데 굳이 우리가 알 필요가 있어? "
" 어, 그게 말이지. 내일 다시 만나기로 했거든. "
" ……하? "
" 사라졌다며. "
" 쫓아갔어. "
" … "
" … "
" 초면 구닥다리 멘트에 끈질긴 남자라니… 그렇게 안 봤는데. 아니 잠시만. 내일? "
" 응. 레지스탕스로부터 무기 공급받기로 한 날. "
" 어쩌려고? "
" 나 대신 너희 중 하나가 대신 가주면 안 될까? 거래 내용은 지난 번에 다 정했으니 소속 확인하고 받아오기만 하면 돼. "
" 이거 무슨… "
" 부탁할게. 응? "
이어지는 한숨이 넷.
Destroyer and Protecter.
Subordinate.
Glittering. (with Freud)
Past.
와아아아─────
하늘을 찌를 듯 커다란 함성이 콜로세움을 메웠다. 허공으로 피어오르는 피의 꽃. 철퍼덕 바닥에 흩뿌려지는 살덩어리와 뼛조각. 얼마나 많은 오물로 뒤덮혔는지 차례가 끝날 때마다 물을 부어 씻어내려도 지워지지 않는 바닥의 자국들. 쾌쾌한 지하의 공기는 철문 안쪽에 맴돌고 철내음은 사람들의 광포한 신경을 자극한다. 퍼억, 피에 절은 몽둥이질에 머리가 뭉개져 어깨 속으로 들어가버린 몸뚱아리가 털썩 쓰러졌다.
대륙의 지배자가 거느린 여덟 귀족들 중 윙마스터의 사조직, 블랙윙이 주최하는 콜로세움은 회가 거듭될 수록 참여하는 인원도 구경하는 인파도 불어났다. 군주가 친히 허가를 내린 시설인데다 블랙윙이 암흑 속에서 차지하는 위명이 뒷받침되어 콜로세움은 빛의 세계에서든 어둠의 세계에서든 유명했다.
너른 경기장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특등석은 귀족과 그 수하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 사이에서도 제법 치열하게 자리다툼이 벌어진다는 그 자리에 한 인영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구비구비 최고급 비단으로 만든 로브를 두르고 팔걸이에 팔을 올린 채 그는 경기장 어딘가로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의 끝, 지하로 연결되는 철문이 드르륵 열리고 한 어린아이가 걸어나왔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위태한 걸음이었지만 꿋꿋하게 허리를 편 아이의 양 손목에 묵직한 쇠고랑이 차있었다. 특등석 안에서 해설과 시중을 맡고 있는 관리자가 제 옆 사내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 이번엔 7번째 경기에 참여하는 아인족입니다. 열도 되어보이지 않지만 올해로 열둘이고, 6전 3승1무 1패를 기록했습니다. 이번에 이기면 3연승이 됩니다. "
아이가 나온 철문이 닫히고, 반대쪽 철문이 열렸다. 쿵, 쿵, 쿵. 묵직한 소리가 땅을 울렸다. 이내 그 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내자 와아아아, 다시 한 번 함성이 터졌다. 짙은 녹색 피부에 흘러내리는 점액질을 닦을 생각도 않고 우람한 팔에 든 몽둥이를 위협적으로 흔드는 오크였다.
" 블러디 스왐프, 늪의 오크입니다. 이번 기 콜로세움의 유망주 중 하나죠. 저 꼬마도 참 운이 없지, 벌써 세 번 연속 바로크 님과 엘레오노르 님의 이름을 건 상대를… "
사내는 말이 없었다. 무언의 압박감에 관리자가 입을 다물었다.
관리자가 아이의 손을 구속하던 쇠고랑을 풀렀다. 작지 않은 소릴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 그것을 한 번 내려다보고,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가려진 아이의 시선이 상대를 향했다. 자 그럼,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날카로운 호각소리와 함께 오크가 몽둥이를 쳐들고 뛰어들었다.
금방 오크의 손에 전신이 뭉개질 거라는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경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아이가 생각 이상으로 민첩하게 다소 느린 오크의 공격을 쏙쏙 피해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크의 체력은 여느 종족보다 월등했고, 느리긴 하나 조금 스치는 것만으로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아이는 한눈 팔 틈이 없었다. 초반에야 아이의 움직임에 재미있어하던 관중들은 아이가 별다른 공격을 하지 못한 채 피하기만 하자 흥미를 잃었다. 수군거림이 커지더니 한 쪽에선 빨리 끝내버리라는 말이 욕설과 함께 터져나왔다.
(중략)
흐응. 턱을 짚은 손가락에 무게가 실렸다. 더 말해봐. 허락이 떨어지자 안심하고 말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고작 열둘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여기까지 버틴 것도 기적이죠. 어디서 굴러먹었는진 몰라도 꽤 시궁창이었을 텐데, 이겨봐야 다음 경기까지 한 숨 돌리는 게 다니 차라리 여기서 끝나는 게 저 꼬마를 위한 길일지도.
하아, 하아.
단내 나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아이는 눈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눈앞이 흐릿했다. 긴장을 조금이라도 풀면 쓰러질 것 같았다. 돌아가야 하는데. 지하로, 다음 경기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철문 안쪽 어둠으로 들어섰을 때, 퍽, 무언가가 아이를 걷어찼다. 커억. 작은 몸뚱아리가 벽에 처박혔다.
(중략)
엘레오노르 님 운운하던 남자들은 오간 데 없고 뜨거운 액체만 흥건하게 고여있었다. 흉부를 부여잡고 거칠게 기침하다 멍하니 웅덩이를 내려다보는 아이의 앞에, 새하얀 손이 내밀어졌다.
Shattered. (with Frued)
In the end.
" 후회하나? 그 날 이 손을 잡은 것을. "
그가 툭 던진 물음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은월은 줄곧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감히 그의 존안을 바라보았다. 짧은 유희를 즐기고 다시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료로 들어찬 적안이 어둠 속에서도 매서롭게 빛났다.
분명, 그 날 그의 흰 손을 뿌리쳤더라면, 고통을 조금 더 인내하여 또다른 손을 마주잡았더라면. 자신의 인생은 노예가 아니라 누군가와 동등한 위치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잠깐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달고 아쉬웠다.
그러나,
" 아닙니다. "
지나간 일에 대해 가정이란 무의미하다. 한순간의 충동이든 포기에서 기인한 애달픔이든 은월은 선택했고, 그 뒤로 길은 하나뿐이었다.
또다른 길은 없다.
" 언제까지고 당신의 뒤에 서있기를. "
입술을 달싹이며 되뇌였다.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듯 몇 번이나 심중에 새긴 말을. 작디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에게는 충분히 닿았을 것이다.
일순 만족스레 올라갔던 입꼬리가 다시금 무심하게 맞물렸다. 그 어느 것도 고려할 필요가 없는 잔인하고 위대한 군주를 움직이는 것은 조그마한 불씨와 같은 흥미뿐이더라.
Endl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