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업4
13.6.27
BW/ 토우야/ 즐거운 여행
박사님은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셨다. 보는 사람도 절로 웃게 만들 화사한 미소였지만 정작 정면에서 그 미소를 마주하는 나는 웃지 않았다. 안도와 기쁨, 약간의 걱정을 담고 있는 박사님의 얼굴에서 다시금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좋지 못한, 기억.
축하해, 토우야. 네가 벨과 체렌과 마을을 떠난 게 엊그제같은데 벌써 사천왕을 이기고 여행을 끝마치다니... 이래서 세월은 눈 깜짝할 새에 간다고 말하나봐.
토우야는 대답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시선을 내리깔고 입을 다문 그 모습에 주박사는 안색을 굳혔다. 아무리 사람보다 포켓몬에게 관심이 더 많아 일생을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지만 천성이 밝고 사람 대하기에 익숙한 그녀였다. 이제 막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어린 소년이 왜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주박사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음.. 아 그래! 차 내올테니까 잠깐 거기 앉아있을래? 새로 들인 찻잎으로 끓인 건데 향이 정말 좋거든.
주박사는 토우야의 어깨를 살짝 눌러 의자에 앉히고 잰걸음으로 커피포트가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포트를 들고 세면대로 가 물을 채우며, 주박사는 토우야가 알아차라지 못할 만큼 작게 한숨을 쉬었다. 포트에 채워지는 물의 소용돌이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그녀의 눈을 어지럽혔다.
여행이란 즐거움이 가득한 모험이다. 물론 도중에 어려운 일을 겪고 힘든 경험도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끝마친 후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여행을 했다는 증거가 되리라. 반대로 즐겁다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모험은 그저 방랑에 불과할 뿐이다. 주박사는 슬쩍 뒤를 돌아 토우야를 힐끔 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기한 내에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왔지만, 토우야에게는 아무런 생기가 없었다. 얼굴 어디에서도 밝은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는 그 모습은, 아마 강제로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게 된 경위 때문임이 분명했다.
분명 토우야 자신의 의사로 결정한 여행이었다. 파트너를 선택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내딘 첫 여정은, 첫 목적지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곳을 돌아다니며 얻는 것은 다양한 인연이다. 하지만 왜 하필 토우야가 여행을 떠난 날 플라즈마단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군중 사이에 끼어있던 플라즈마단의 왕이 광장에서 토우야의 포켓몬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어지는 행보에서 알 수 없는 말들을 남기고 떠났는지 주박사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주박사는 운명론자는 아니었지만, 운명이라는 게 별자리대로 정해져있다면 참 얄궂은 만남을 주선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포켓몬을 인간의 손에서 해방시킨다는, 굉장히 급진적인 사상을 내새우며 플라즈마단은 하나지방을 활보했다. 원래대로라면 길이 이어지는대로 도시와 마을을 이동했겠지만 플라즈마단의 난폭한 행동에 선택은 제한되었다. 진로는 거의 정해져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토우야는 가는 곳마다 플라즈마단과 마주쳐 싸워야했고, 이기기 위해 강해져야했다. 마을을 차분히 둘러보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체육관 관장에게 도전하기만도 시간이 촉박했으니까. 마을로 돌아와 세간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타인의 손에 선택의 기로를 내던지고 싶어하지 않았다. 토우야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게 쫓기듯 싸우고, 정보를 모으고, 다음 마을로 이동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몇 번씩 주박사와 라이브캐스터를 통해 연락했고, 주박사는 샤로다로 최종진화했어요, 보고하는 토우야의 단아한 미소를 보았다. 아무리 점점 강해지고 많은 것을 보고있다지만 아직 어린아이라, 주박사는 파트너의 진화에 기뻐하는 얼굴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금방 눈치챘다. 토우야에게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멀뚱히 아무 일도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왔고, 주박사는 자신이 아이의 여행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그 문제를 집어넣었다.
그게 잘못이었을까.
좀더 캐물어서라도 확인을 했어야하나.
씁쓸한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보아도, 필요한 정보 제공이 아닌 이상 아이들의 여행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스스로의 결심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시간을 거슬러간다면 자신은 다른 선택을 했을까, 주박사는 자신없이 중얼거렸다.
쏴아─ 포트의 물이 흘러넘치며 손을 적셨다. 차가운 감촉에 정신을 차린 주박사가 가득 찬 물을 절반으로 덜어냈다. 포트를 단지에 올려놓고 붉은 버튼을 누른 뒤, 주박사는 뒤를 돌았다.
토우야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의자 목에 고개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일까. 내가 그렇게 오래 물을 받고 있었나? 주박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토우야에게 다가갔다.
얼굴에 진 수심이 짙은 그림자처럼 안색을 내리누르고 있어, 주박사는 손을 들어 토우야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며칠이나 잠을 설쳤는지 다크써클까지 생겼다. 자세가 불편한 것치고는 깊은 잠에 빠졌는지, 토우야는 외부의 손길에 고개를 살짝 흔들 뿐 깨어나지 않았다.
조금 더 자게 내버려둘까. 토우야가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으리라. 주박사는 토우야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토우야가 무의식중에 웅얼거리는 소리는 아주 작아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몇 번을 반복하는 말을 되짚던 주박사는 이내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건 이름이었다. 짧지만 긴 여행을 함께 한 토우야의 파트너도, 소꿉친구들도, 그 어떤 인연도 아닌 단 한 사람의 이름.
그것이 누구의 이름인지 잘 알고 있는 주박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애절함에 화가 나고 안타까운 마음이 괴롭다.
주박사는 토우야의 어깨를 살며시 흔들었다. 토우야, 일어나야지. 이내 눈꺼풀을 들어올린 토우야는 흐릿한 눈을 비비적거리며 가볍게 하품을 했다.
밤에 TV프로그램이라도 보니?
죄송해요. 요새 생각할 게 좀 많다보니 잠을 못자서…
잠이 부족한 건 건강에 좋지 않아요. 자, 여기 차.
토우야는 주박사로부터 찻잔을 받아 한 모금 삼켰다. 산뜻한 향이었지만, 찻물에 닿는 순간 뜨거움에 혀가 얼얼해졌다.
뜨거우니까 식혀마시렴.
이미 늦은 것 같지만 말이야. 걱정을 감추며 장난스럽게 윙크를 한 주박사가 자기 몫의 찻잔을 들고 토우야의 옆에 털썩 앉았다.
13.6.29
BW/ N남주/ 파르페
자, 아.
아?
입술에 닿은 프리츠를 저도 모르게 혀끝으로 핥자 짭짤한 기름이 묻어났다. 프리츠를 N의 입에 걸쳐놓은 토우야는 자신의 앞에 놓인 파르페의 둥근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수저 떠올렸다. 숟가락 크기보다 훨씬 크게 뜬 아이스크림 밑을 받치며 토우야는 수저를 N쪽으로 내밀었다. 설마…?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뜬 N의 입에 토우야는 수저를 쑤셔넣었다. 설마가 사람잡는다는 말이 있던가. 말그대로 '쑤셔넣어진' 수저가 입천장을 찌르는 바람에 욱, 가볍게 헛구역질을 삼킨 N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 미안. 혹시 피할까봐.
오우야... 아으잖아.
부드러운 소프트 아이스크림이었지만 크기가 크기인지라 뜨거운 혓바닥에 닿는 순간 녹아버린다던가 하지 않았다. 입 안에 가득 찬 냉기에 볼이 얼어버릴 것 같았다. 불룩 튀어나온 볼 때문에 발음이 뭉개졌지만, 눈물 어린 N의 눈을 보고 무슨 말인지 알아챈 토우야가 베싯 웃었다.
원래 이런 건 첫 숟갈을 듬뿍 떠서 먹여야하는거야.
네가 먹는 게 아니고?
그 다음에 내가 먹으면 되지.
음…
그런가? N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토우야와 함께 여행을 하며 세상의 상식을 하나 둘씩 다시 배워가고 있는 N이었기에, 토우야가 너무나 당당한 태도로 말하자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물론 요즈음 여러가지를 경험하며 키운 눈치가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마음 한 구석에서 외치고 있었지만.
푸.
음? 왜? 목에 걸렸어?
아니, 그냥… 농담을 하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니까 재미있어서.
농담이었구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프리츠 두 개를 동시에 들어 오독오독 씹어먹으며 N이 중얼거렸다. 토우야는 그런 N을 보며 파르페 가장자리에 꽂혀있던 과자를 한 입에 털어넣었다.
13.9.26
BW/ N남주/ 갑자기 N의 몸에 강력한 자성이 발생했다는 망상
세계는 회색으로 변해간다… 나는 그것을 용서할 수 없어. 포켓몬과 인간을 갈라놓고 옳고 그름을 확실… 윽?
눈앞의 소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있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죽 이어나가던 청년이 갑자기 흔들렸다. 그 바람에 말이 도중에 끊겼다. 청년이 말을 다시 이을 틈도 없이 곧이어 파직, 새파란 정전기가 일어나며 청년의 어깨에 달려들었다. 발에 채이지도 않을 돌멩이였다. 크기가 작아서 물리적인 타격은 적었지만 거리에 따른 가속력 때문에 청년의 상체가 뒤로 휘청했다. 놀란 소년이 청년을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탁. 청년이 매섭게 손을 쳐내는 소리가 정전기에 묻혔다.
됐어. 사람과 닿고 싶지 않아…
냉정하게 말하며 어깨의 돌멩이를 떼어내려는데 무슨 일인지 돌멩이로부터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청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청년이 쳐낸 손을 다른 손으로 문지르던 소년이 앗, 짧은 비명을 입 밖으로 내며 청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청년이 힘껏 바닥을 박차는 소년의 위로 넘어지는 동시에, 좀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청년이 서있던 자리에서 터졌다. 덕분에 두 사람 모두 귀가 멍멍해진 채 얼마간 얼이 빠져있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청년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시도는 했지만 다시 자빠졌다. 이번엔 무릎만 굽혀지는 수준이 아니라 가슴과 가슴이 맞닿게 포개어졌다. 억지로 힘을 주어보았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청년은 자신의 몸에서 발하는 푸른 빛을 발견하고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전기돌동굴 특유의 푸른 정전기가 왜 스스로에게서 나고 있는지 영특한 머리로도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탓이었다.
삐걱대며 빠르게 돌아가는 청년의 사고를 방해한 것은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였다.
저기… 일단 이 머리카락 좀…
넘어지면서 모자가 벗겨지는 바람에 풍성한 녹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뼈대가 가늘지만 자신보다 키도 체격도 큰 청년이 놀라서 뛰는 심장을 압박해와, 어렵사리 숨을 들이키고 내뱉던 소년의 얼굴 절반을 흩어진 녹색 머리카락이 가로막고 있었다. 아.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스륵 올라가는 머리카락 사이로 고동색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푸른 빛을 반사하는 고동색이 부드럽고 짙었다. 다소 서늘한 동굴 속에서 따뜻해보이는 시선이 그를 사로잡았다.
13.9.26
BW/ N남주/ Near
슥슥.
TV 속의 앵커를 멍하니 쳐다보던 N은 고개를 살짝 돌려 얼굴을 만져오는 손길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토우야? 왜?
그냥. 갑자기 옛날이 떠올라서.
무슨 말인지 물으려고 했으나 토우야의 손에 양쪽 볼이 늘어지며 그 의도를 달성할 수 없게 된 N의 입에서 무흐으… 일그러진 바람소리를 흘러나왔다. 토우야는 N의 볼살을 옆으로 늘렸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두번째 만났을 때 관람차 탔던 거, 기억 나?
아아. 뇌문시티의 관람차.
거기서 N이 정체를 밝히고, 선전포고 해주었지. 정상으로 올라갈 테니까 따라오라고.
음... 그랬지.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가슴 한구석이 간질이는 감각에 N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토우야와 함께 있을 때에 느낄 수 있는, 따끈따끈한 감각과는 조금 달리 묘하게 꺼림직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화가 끝나고 토우야는 크게 웃으며 그게 부끄러움이라는 거야,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만 일단 넘어가자.
그때가 N이 처음으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던 때인 거 알아?
여전히 N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토우야가 시선을 마주쳐왔다. 초록빛을 한아름 담은 눈동자가 싱그럽게 휘어졌다.
처음 만났을 때 N은 포켓몬에게만 손을 뻗고 사람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는 걸. 갑자기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시합하자고 해놓고선 여전히 저만치 떨어져서 포켓몬만 쳐다보고 있지… 첫인상은 참 강렬했지만, 나는 안중에도 없는 느낌?
실제로 그러했기에, N은 아무 말 없이 토우야의 손길을 받아냈다. 과거의 자신은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비정한 구석이 있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는.
키는 나보다 크지, 시선은 내가 아니라 다른 먼 곳을 보고 있지, 가뜩이나 말이 빨라서 알아듣기 어려운데 말하는 내용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이런 게 뒤섞인 첫인상이었거든. 그런데 관람차에서 내린 다음 갑자기 N이 얼굴을 들이대니까 깜짝 놀랐어.
아, 그거. 딱히 놀래킬 생각은 없었는데.
응 알아. 그래도 깜짝 놀라서 굳어있는데 N은 또 자기 말만 하고.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가버렸지? 지금 생각하니 서운하네.
고의가 아니었어. 미안해.
괜찮아, 사과는 무슨. 그때 N의 얼굴을 자세하게 볼 수 있었어. 지금보다 더 핏기 없이 창백하더라. 웃기도 하는구나 싶더라니까?
내가 웃었었어?
입꼬리가 이렇-게 올라가 있으면 웃는 거지 뭐.
토우야는 거꾸로 내려다본 입술을 손가락으로 비죽 올렸다. 강제로 만들어진 웃음이 어설펐다.
그래도 그제야 비로소 N을 마주했다는 느낌이 들었어. 포켓몬이 아니라 나를, 그렇게 가까이서 봐주었으니까.
그건,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야 한다는 뜻?
응? 아니. 마음 측면에서 말이야.
물론 실제 거리도 중요하지, 지금처럼. 토우야가 고개를 숙였다. 시선과 시선이 곧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그런 건가… 알 것 같아.
다행이네.
손을 뻗어 토우야의 머리를 끌어당긴 N이 귓가에 속삭였다. 가늘게 휘어지는 눈웃음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13.10월 언저리
BW~BW2/ N과 쌔비냥/ 별다를 것 없는 N과 쌔비냥의 이야기. 1은 과거(N), 2는 현재(쿄우헤이).
~0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해.
너는 화려한 방 안에 덩그라니 앉아있었어. 어째서일까, 분명 작지 않은 네가 아무런 힘도 없는 어린아이처럼 보였지. 나를 구속한 여자가 방 입구에 서서 너를 부르자 너는 천천히 돌아보았어. 너를 부른 건 여자였을 텐데 너의 시선은 단번에 나를 향했어. 차갑게 식은 풀빛 눈동자가 뭉클하게 나를 감싸안았어.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를 내려놓고 사라졌어. 나는, 두 다리가 묶인 가운데 으르렁댔어. 입을 가둔 구속구만 아니었다면 네가 뻗은 손을 당장에라도 물어뜯었을 거야. 너는 아마 알고 있었겠지. 그때 내가 품고 있던 검은 핏빛 감정의 무게를.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너는 나를 묶은 단단한 줄을 풀어주었어. 동시에 나는 바닥을 박차고 너를 들이박았지. 너의 눈에 담긴 간지러운 감정을 나는 읽지 못했어. 읽고 싶지 않았어. 혼신을 다한 나의 일격에 너는 뒤로 넘어지며 크게 굴렀어. 깔끔하게 쌓여있던 레고 블럭이 와르르 무너져내렸어. 나는 플라스틱 미끄럼틀 위로 뛰어올라가 몸을 웅크렸어. 등의 털을 곤두세우고 벌벌 떨며 구석에서 너를 살폈어. 네가 일어나면 언제라도 달려들어 공격할 수 있도록. 그러나 너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어. 어지럽게 흩어진 블럭 속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고 있었지. 그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없었어.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표정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더욱 안으로 구겼어. 너는 나의 반응에 귀를 열고 있으면서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나를 데리고 왔던 여자가 허둥지둥 달려와 나를 잡으려 들 때까지 우리의 기묘한 대치상태는 계속되었어. 아니,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경계를 했을 뿐, 너는 그대로였어. 웃지도, 화내지도, 울지도 않고 날 잡으려드는 여자를 제지하며 상체만 일으켜세웠지. 여자의 항변을 가볍게 물리치고 너는 고개를 저었어. 그땐 아직 사람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을 때였지만 방 안에 흐르는 공기가 반으로 잘린 꼬리를 자극했어. 여자는 너를 불렀고 너는 여자를 따라나섰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떼던 네가 아주 잠시동안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어. 나는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차가운, 그런데도 일렁이는 시선을 피했어. 너는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렸어. 앞서가던 여자도 듣지 못할 만큼 작고 나지막한 말이었지. 그 말은 나에게만 들렸어. 공기의 흐름을 따라 오로지 나에게만 내려앉았어. 나는 못 들은 척 웅크린 다리에 머리를 묻었어. 이윽고 네가 방을 나서고 문이 닫혔어. 방 안에는 더는 아무도 없이, 알록달록한 색상이 쓸쓸하게 박제되어있을 뿐이었어.
네가 돌아올 때까지 나는 한결같은 자세로 웅크리고 있었어. 이 방에 도달하기까지 겪은 시간들이 내 속에서 곪아가고 있었어. 안으로 밖으로 부풀어오른 고름은 조금만 움직여도 터져버릴 것 같았어. 너를 블럭 속으로 자빠뜨리는 일격을 마지막으로 모든 힘을 써버린 나는 더는 움직일 수 없었어. 나는 그 상태로 잠이 들었던 것 같아. 확실하지는 않아, 왜냐하면 주변 공기는 곤두선 털에 샅샅이 맞닿아있었고 내가 꾼 꿈인지 떠올린 기억인지 알 수 없었거든. 어느 쪽이든 좋지는 않았어. 아주 나빴지. 이전까지의 일상, 나를 이름도 모르는 도시에 두고 가는 손길, 어둠 속에서 나를 향해 날아오는 무겁고 아픈 물건들, 발길질, 핏빛으로 물드는 시야, 한순간의 작은 온기, 따갑게 울리는 공기의 진동, 차가운 철창, 몸 속에 주입되는 소름끼치는 액체… 전신을 옭아매는 올무, 일정한 발소리, 크고 웅장한 복도를 지나… 보이지 않는 방벽을 파고드는 그 눈빛. 네가 중얼거린 작은 말. 난 울고 있었어. 그런데 울고 있지 않았어. 아무도 내가 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어. 인간들은 물론이고 함께 있던 친구들조차. 내가 입을 다물고 있다는 사실을 너는 알고 있었지. 나의 신음소리, 비명소리, 악 쓰는 소리는 분명 들렸을 텐데. 그래서 그들은 나를 때리고 괴롭혔는데. 빙글빙글. 뚜르르르. 빙빙빙빙… 온갖 것들이 뒤섞여 회전하는 세계가 시끄러워서 내가 말하는 소리는 쓰레기더미 속 찌끄러기처럼 묻혀있었어.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자신에게도 되돌아오지 못하는 말은 의미가 없었어. 그래서 나는 입을 닫았지. 마음을 닫았지. 그 누구도 듣지 못하도록. 겁쟁이인 내가 아무에게나 매달려 도움을 구걸하지 못하도록. 나는 사라지고 있었어. 육체도 마음도 한계에 다다랐을 때였어.
너는 말했어,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몰라, 너의 말을 듣고 싶어. 너의 말이 어느 순간부터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어. 나를 감싸고 껴안는 풀빛 시선이 있었어. 세계는 조용해졌어. 나를 때리던 소리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어. 그 순간부터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어. 나는 꿈을 꾸었고, 꿈 속에서 조금, 많이, 울었어.
~1.1
나의 새로운 동행자는 상당한 덜렁이다.
사람 자체는 넉살좋고 성실해서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보이는데 의외로 덜렁거리는 구색이 있다. 물건을 빼먹는다거나 길을 가다 작은 홈에 걸려 넘어진다거나. 주변에 사람이 있을 때는 멀쩡한데 이상하게도 혼자 있을 때, 주로 몬스터볼 속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그런 모습을 보이니 지켜보는 내 입장에선 어이가 없는 한편 신기한 생명체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물론 이전 함께 다니던 N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과 어딘가가 다른 특이한 친구긴 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는 한결같은 모습이어서 괴리감이나 이상함같은 건 전혀 없었다. 나보다 오래 N의 옆에 있던 조로아도 거기에 동의했으니 말은 다했지. 문득 하나로 잘근 묶은 녹빛 머리가 눈앞을 스쳐, 나는 코를 한 번 씰룩거렸다.
~2.1
N이 마지막 조각을 끼웠다. 완성된 퍼즐 속 그림은 움직이는 영상을 담고 있었다. 천의 장막 같은 오색빛이 검은 하늘 위에 물결치는 장면이 두 눈에 콕 들어와박혔다. 그건 정말로 처음 보는 풍경이라, 나는 답지 않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그런 나를 옆에서 지켜보던 조로아가 킥킥대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평소라면 얄미운 조로아를 한껏 째려봐주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여지껏 보았던 그 어떤 반짝이는 돌보다 색이 화려한 오색빛이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멍하니 있자 조로아는 웃다 말고 N의 어깨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는데 공기가 작게 울리는 소리만 들릴 뿐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조로아의 말을 들은 N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입을 헤 벌리고 있다가 그 시선에 비로소 정신이 든 나는 절로 두리번거리려는 목에 힘을 주고 다른 곳을 쳐다보는 척 딴청을 피웠다. 그래봐야 때늦은 처사라 조로아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커져만 갔다.
조로아의 웃음은 소리를 글자로 놓고 보면 비웃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소리를 들으면 두 가지 기능을 발휘했다. 상대를 무안하게 하거나, 함께 웃게 만들거나.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에 눈가가 벌겋게 된 나는 N의 무릎 밑에 고개를 숨겼다. 퍼즐을 둘러싸고 있던 다른 포켓몬들은 조로아에게 전염이 되었는지 저마다 짧게 웃으며 동조했다. 그나마 나를 배려한 깜눈크가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참았는데, 길쭉한 입에서 기침과 함께 모래덩어리가 튀어나와 조로아 다음으로 제일 신나게 웃어재끼던 곤율랭의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잠시 소동이 벌어졌다. 원래부터가 촐랑대는 성격이라 곤율랭의 엄살은 대단했다. 눈을 질끈 감고 모래덩어리를 투포한 깜눈크에게로 달려들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려 피했지만 꼬리가 밟혀버린 깜눈크가 크앙 울었다. 내가 N의 무릎 아래에서 속으로 숫자 10을 세는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곤율랭의 발광 아닌 발광은 그가 저편에 쌓여있던 블록을 넘어뜨리고 벽에 머리를 박았다가 데굴데굴 굴러 N의 앞으로 되돌아온 후에야 잠잠해졌다. 그나마도 N이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달래지 않았다면 이 방을 초토화로 만들었을 테지. 일련의 소동으로 나에 대한 관심이 없어진 틈을 타, 나는 잽싸게 고개를 들어 조로아의 꼬리를 앙 물어버렸다. 킥킥 웃다말고 느닷없이 느껴지는 고통에 검은 여우는 높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곤율랭과 깜눈크의 울음소리에 묻혀버렸고, N이 둘을 달래고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우리 둘은 서로의 꼬리를 노리며 아웅거리고 있었다.
~1.2
가방을 뒤적이다 마침내 발견한 상처약을 두 손으로 들고 덜렁거리는 동행자는 만세를 외쳤다. 그는 풀숲 트레이너와의 배틀 후 간당간당한 체력으로 겨우 버티고 서있던 뚜꾸리에게 상처약을 사용했다. 쭈욱- 약이 눌려올라오는 소리가 길게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체력이 눈에 띄게 차오른 뚜꾸리가 코를 킁킁거리며 주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반동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용케 무게중심을 바로잡은 쿄우헤이가 헤헤 웃자 그에 화답하듯 뚜꾸리도 눈을 산모양으로 접으며 꾸륵꾸륵 울어댔다. 사람 하나와 포켓몬 하나가 똑같은 표정으로 헤실거리고 있는 모습은 상당히 귀엽고 우스꽝스러웠다. 풀숲에서 보르쥐 하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심심--한 눈초리로 둘을 쳐다볼 정도였다. 호기심 반, 경계심 반으로 풀숲에서 머리 이상 내밀지 않는 보르쥐를 향해 쌔비냥이 킁 콧방귀를 냈다. 가만히 서서 주인과 뚜꾸리의 행태를 지켜보던 리오르가 보르쥐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두 포켓몬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보르쥐는 부스럭거리며 풀숲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제야 쌔비냥은 원래의 도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리오르는 잠시 고민하다가, 쌔비냥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거리에 앉아 좀전의 시합에서 배운 새로운 기술을 손으로 흉내내었다. 리오르의 손에서 파동이 불안하게 일렁거렸다. 금세 생긴 땀방울을 달고 자세를 취하는 것까진 좋았지만 아직 그 기술을 사용하기에 리오르의 솜씨는 미숙했다.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붙잡다가 한 번 사용해볼까 하는 마음에 리오르는 풀숲을 향해 오른팔을 길게 뻗었다. 기이이- 흰 연기가 일며 팔이 부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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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르는 점점 경련이 가라앉는 팔을 한 번 내려다보고 쌔비냥을 보았다. 쌔비냥은 단호하게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그에 수긍한 리오르가 감사의 표시를 전하고자 한 발자국 다가갔지만, 쌔비냥은 자리에서 일어나 쿄우헤이의 옆으로 가고 있었다. 어느새 뚜꾸리를 볼에 돌려놓은 쿄우헤이가 리오르를 불렀다. 어쩐지 머쓱해진 기분에 귀를 살짝 젖히며 리오르는 주인에게로 달려갔다.
~2.2
N의 방에는 규칙적인 것들이 참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방바닥에 깔린 타일이었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등 다양한 색으로 칠해진 타일은 누가 맞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구석부터 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패턴을 자랑했다. 우리는 심심하면 이따금 하나의 색 타일만 밟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일종의 숨바꼭질이었는데, 술래가 정하는 색깔만 밟아야했다. 몸집이 큰 불비달마나 신체구조상 불리한 깜눈크같이 옆으로 밀려나 자동으로 심판이 된 포켓몬들이 준비, 시작! 을 외치면 놀이는 시작되었다.
그날은 파쪼옥이 처음으로 술래가 된 날이었다. N의 방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포켓몬들이 모두 그러하듯, 파쪼옥은 주변에 굉장히 예민했다. 이곳에 있는 포켓몬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가까이만 다가가면 흠칫 몸을 떨며 뒤로 빠지기 일쑤였다. 며칠 전부터 우리들이 같은 놀이를 반복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 파쪼옥이 머뭇거리면서도 관심을 보이자, N은 웃으면서 파쪼옥을 들어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유일하게 상처입은 포켓몬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고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N은 이곳에 있는 포켓몬들의 소중한 친구이자, 서로의 존재에 손을 뻗게 만들어주는 중재자였다. N의 속삭임을 들은 파쪼옥이 용기를 내어 놀이를 시작하려는 우리에게 다가왔고, 그날 우리가 밟아야 하는 타일은 노란색이 되었다.
처음에는 망설이며 아주 느린 속도로 멀찍이 도망가 좁은 타일 위에서 아등바등거리는 우리들을 쫓던 파쪼옥은, 시간이 조금 지나자 놀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크기가 작은데다 무게도 가벼워서 그는 공을 퉁기듯 통통 튀어 원하는 위치로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하나씩 파쪼옥의 행진에 붙잡히고, 남은 두 포켓몬은 나와 달막화 뿐이었다. 가벼운데다 은근히 날렵해서 끝까지 남을 것 같던 조로아는 사실 제일 처음 붙잡혀서 아웃되었다. 심판들 옆에서 살아남은 쪽을 쳐다보는 표정이 뾰루뚱한 게 딱 보여서 내가 슬쩍 웃자 방방 뛰기 시작하는데… 정말이지, 그 녀석이 펄쩍 뛰는 모습에 잠깐 정신을 팔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그날 승자는 내가 되었을 것이다. 가정형인 이유는, 술래가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나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파쪼옥은 내 머리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고 나는 금세 태도가 바뀌어 실실거리며 나를 비웃는 조로아의 옆으로 퇴장해야했다.
그날 파쪼옥은 마지막 남은 달막화까지 가볍게 캐치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모두가 축하의 말을 하나씩 던지자 파쪼옥은 와- 박수를 치던 N에게로 쪼르르 기어가 그의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N의 팔이 새하얀 실로 꾸물꾸물 감기는 걸 보면 꽤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나와 조로아는 퇴장진에서 아웅다웅 다투다가 불비달마에게 제재당하고 한소리를 듣고 있었다. 불비달마는 어른처럼 차분한 성격이었는데다가 덩치까지 커서 N과는 다른 의미로 포켓몬들을 잘 다루는 존재였다. 엄마, 아니지. 손윗 존재, 형 정도 될까. N은 우리를 혼낸 적이 없었기에 우리는 형같은 존재의 꾸중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에게 상투적인 사과의 말을 건네고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 같았던 설전은, 불비달마의 눈을 피해 조로아가 베- 혓바닥을 내밀며 나를 약올리는 바람에 다시 시작될 뻔했다. 가정에 과거형인 이유는? 불비달마가 그것을 눈치채고 조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오로지 자기 기준으로) 주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났으니까 그렇지.
~1.3
여행의 속도는 생각보다 느렸다. 이리저리 풍경을 둘러보며 걷는 쿄우헤이는 유유자적,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내가 아는 여행은 좀더 빨랐던 것 같은데. 쿄우헤이의 뒤를 따라 걷는 입장이니 몬스터볼 안에 마냥 갇혀있는 것보단 지루하지 않았다. 날씨도 좋고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풀내음이 솔솔 풍기니 저도 모르게 꼬리가 바람의 흐름에 맞추어 살랑살랑 흔들렸다.
이대로 가다간 졸음이 쏟아질 것만 같아, 눈을 가늘게 뜨고 앞서 걸어가는 쿄우헤이의 등을 올려다보았다. 발걸음에 맞춰 유동성 있게 움직이는 어깨죽지에 어디선가 날아온 하얀 솜털이 붙어있었다. 이 근방에는 초목이 많아도 꽃은 별로 없는데 어디서 날아온걸까. 작은 호기심은 곧이어 눈앞으로 붕 떠오른 또다른 솜털이 해결해주었다. 이번에는 노란빛을 머금고 있었는데, 주변 초목과는 다르게 달달한 꿀향기가 났다. 아마 포켓몬의 피부에 붙어있었겠지. 이 근방에는 이런 향기를 가진 포켓몬이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다면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는 포켓몬일까? 새로이 궁금한 마음이 돋아났지만 굳이 찾을 필요도 없어서, 솜털을 유심히 살피느라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사뿐사뿐 걷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2년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긴걸까. 변하지 않은 풍경을 보며 생각한다. 2년보다 더 오래된 시간 속의 기억은 오히려 생생한데, 2년 전부터 최근까지의 기억은 안개처럼 모호하다.
문득 으엣취- 하는 거창한 재채기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바람에 날린 솜털이 콧잔등을 간지럽혔는지 인중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쿄우헤이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쌔비냥을 향해 멋쩍게 웃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솜털의 양은 점점 늘어나 몇 발자국 지나지 않아 꽃비처럼 사방에 가득했다. 쿄우헤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지면을 물들이는 가운데 희고 노란 솜털들이 눈처럼 천천히 떨어져내리는 건 꽤 보기 드문 과경이었기 때문이리라. 솜털더미를 마주치자마자 경계하며 털을 곤두세웠던 쌔비냥은 금세 근원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쌔비냥의 얼굴보다 작아보이는 샛노란 덩어리가 풀숲을 부시락거리며 튀어나온 것이다.
언뜻 보면 그냥 꽃송이같이 생긴 샛노란 덩어리 포켓몬에게 적의는 없어보였다. 쌔비냥은 경계를 풀고 쿄우헤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어느새 가방에서 도감을 꺼내어 새로이 등장한 포켓몬을 향하고 있었다.
" 이름이 해너츠구나. 지난 여름에 집 앞에 잔뜩 떨어져있어서 치우... 떼어내느라 고생 좀 했었는데. 이렇게 움직일 수도 있네? "
신기한듯 말하는 쿄우헤이를 멀뚱히 올려다보던 해너츠가 잠시 그 자리에 직립되어있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돌려 풀숲으로 들어갔다. 앗, 잠깐만 기다려~ 사람을 피해 도망가는 듯한 해너츠를 쫓아 쿄우헤이가 황급히 풀숲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이었다.
팟─ 풀숲에서 대량의 무언가가 튀어올랐다. 그 기세에 밀린 쿄우헤이가 으악?! 헤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땅이 몸을 잡아당기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그가 본 것은, 걷는 길 내내 코 끝을 간질이던 하얀 솜털들. 수북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하늘에 퍼진 샛노란 해너츠 무리였다. 얼핏 보면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간간이 부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이 바닷속의 해파리 같기도 하고 오선지 위의 음표같기도 했다. 허리로 전해지는 격통도 잊고 쿄우헤이는 멍하니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방긋 웃는 해너츠의 얼굴이 유난히 밝아보였다.
쿄우헤이가 넘어짐과 동시에 슬쩍 옆으로 피한 쌔비냥도 (넋을 놓은 쿄우헤이만큼은 아니었지만) 해너츠 무리를 바라보았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에 화사한 색감이 눈앞에서 한들한들 춤을 추자 눈꺼풀 아래가 나른해지는 느낌이었다. 문득 작은 해너츠 하나가 가는 발을 뻗으며 쌔비냥의 머리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악의가 없는데다 애초에 여행을 시작한 내내 마주한 풀쪼가리같은 존재에 반응하기도 뭐해 가만히 있자 조금 움츠려있던 해너츠는 안심한듯 몸을 늘어뜨렸다. 머리 위에 있다는 것도 느끼기 힘들만큼 가볍고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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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빛이 터져나왔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온사방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바람 없는 설원에 갖힌 것처럼.
~2. ?
야생에 남겨져 가장 먼저 적응한 것은 머리가 아닌 몸이었다. 심란하기 그지없는 머리는 항상 낯익은 색상을 좇고 있는데, 그와 관련없이 몸은 정직하게 굶주림과 아픔을 호소해왔다. 주인을 밤낮으로 기다리며 결국은 추위에 굶어죽었다는 어느 포켓몬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맹목적인 충성심, 감정. 물론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주인이 아니라는 점도 있었지만, 오랜 시간 생존이 몸에 우선적으로 베어버렸기 때문일까? 사흘째 되던 날 나는 근처 보르쥐들이 숨겨놓은 은신처를 습격해 배를 채웠다. 겨울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물이 오를대로 오른 과일은 유난히 달고 맛있었다.
~2. ?
그건,
결국에는 누군가를 상처입힐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든,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그저 생각에 품고 있는 것만으로 행동에 베어나오는 악의. 짙게 타오르는 눈동자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것은 광기와도 같았다.
아아. 어째서 당신이.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새 이성을 되찾았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게치스였지만, 이미 그의 속에 내재된 무언가를 알아차린 나는 잊을 수 없었다. 분명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랬다. 그 불길, 창보다 날카로운 분노는 그가 터득한 논리 아래 갇혀있었다. 간사한 논의로 겉은 더럽혀졌을지언정 속은 끝없이 불타며 자신의 분노를 풀무질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존해온 감정을, 물려주었나. 어리고 어렸을 아이에게 주입시켰나. 이유도 없이. 아이의 의사를 묻지 않고. 특별한 능력을 저주라고 냉대하면서 꾀어내었나. 아이의 사상을 물들이고 자신이 원하는 [존재]로 끌어올리면서, 일말의 정도 주지 않은 것은 줄 필요가 없었을 뿐더러 애초에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나.
이 자리에 N이 없는 것을 나는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그가 이곳에 있었다면, 게치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저 차갑고 견고하게 굳어버린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N은 분명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