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월른 스터디/ 별
*시작은 나름 장대하고자 했(..)으나 끝은 뱀꼬리도 아니게 되었다
*정령 은월로 하얀 마법사 스토리 이전~이후 살짝. 정작 쓰고 싶던 장면은 대폭 생략되어 컾링이 1도 안 보이는 것 같다
1
그는 탐욕스러운 인간보다 자연의 진리에 가까운 존재들에 관심이 많았다. 에피네아를 처음 찾아간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강한 잠재력을 가졌으나 한편으론 순진한 페어리들은 기꺼이 그에게 필요한 것을 안겨주었다. 인간들의 마을에 꽤 오래되었다고 쌓인 문헌들로부터는 얻을 수 없는 지식이었다. 그러나 그 지식에서조차 궁극의 빛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망망대해와 같은 탐구의 여정. 결코 끝이 보이지 않아 여행자를 좌절케 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페어리의 여왕인 에피네아의 정수를 목전에 두는 기회를 얻었다. 이 세상 무엇보다 맑고 깨끗한 동시에 한 방울의 어둠만으로 순식간에 더러워질 것처럼 연약한 그것은, 머지않은 미래에 한낱 몬스터의 것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다. …타락의 가능성. 이 세상 누구보다 빛에 가까운 그에게는 그것이 보였다. 불현듯 그의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눈을 떴다. 누구도, 그 자신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한 변화는 그를 내부에서부터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후 보다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다른 요정족들을 찾았지만, 그들은 페어리들만큼 인간에 친숙하지도 않을뿐더러 개체 수가 적었다. 그나마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자연에서 드물게 발견되어 문헌에 실리거나 입소문을 타는 경우가 있어, 그는 온갖 곳을 떠돌아다녔다. 바람보다 가볍고 바위보다 무거운 발걸음을 온 세상에 남길 무렵.
2
그는 한 정령을 만났다.
작은 정령을 바람이 휘감고 있었다. 그래서 바람의 정령인가 짐작했지만 아니었다. 정령은 별똥별이 떨어지는 밤, 그 운석의 깨알만 한 파편으로부터 태어났다고 했다. 정령의 냄새를 풍기긴 해도 특별히 힘이나 잠재력은 갖지 못한, 어쩌면 반푼이였다. 정령이지만 연구 가치가 없는 소재. 그의 주의를 끌 만한 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령을 휘감은 바람을 마법으로 퉁겨낸 것은, 정령이 여느 요정족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요정인데도 '온전하게 깨끗'하지 않고 검은 사념에 일부나마 물들어 있는 존재. 타락의 단계에 있으면서도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정령이 그의 내부에 웅크리고 있던 변화의 야수를 자극했다.
바람이 놓아주질 않아 곤란한 참이었다, 뭔가 보답을 원하냐며 다소 어수룩하게 인사를 건네는 정령에게 그는 제안을 하나 했다. 연구를 도와주지 않겠냐는, 부탁이라는 미명의 강제를. 그래, 정령의 대답이 그를 만족스럽게 했다. 그는 당연하게도 인간의 모습보단 단순한 빛 덩어리처럼 보이는 정령을 향해 스펠을 읊었다. 흰 구체 속에 오색의 빛이 일렁이던 정령의 모습이 파르르 흔들리더니 소년과 청년의 사이 즈음 되어 보이는 인간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아직 연구가 부족해 당신에게 완전한 육체를 줄 수는 없지만, 본질이 흐려지지 않는 이상 외양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죠. 정령은 햇빛을 떨어져도 통과되지 않는 제 '팔'을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마법으로 바뀌었다고는 해도 사지로 분산되는 힘이 당장에 적응되지 않은 탓이다. 긴 흑발이 전라의 육신에 흐트러졌다. 그는 다시 마법으로 로브를 만들어 정령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것처럼 태연하게 물었다.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름이란, 본질과 직결되며 때로는 불리는 것만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정령이 눈을 깜빡였다. 눈앞의 인간이 가진 새파란 눈동자가 자꾸만 저를 쫓아오는 바람을 닮았다고 생각하며.
" …은월이라고 해. "
나도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마음(念)이 담긴 이름이야.
연고 없는 작은 정령은 그 본질을 토로했다.
3
정령, 은월의 합류를 발화점으로 그의 변화는 폭발했다. 그는 더이상 각지를 떠돌지 않았다. 사람들의 의문을 뒤로 한 채 평온의 숲에 칩거했다.
요정의 땅보다 깊고 깊은 숲의 어둠에 파고든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의 소문을 들은 인재들이 하나둘씩 숲으로 찾아와 무리를 이루고, 순식간에 학구열의 장은 커다란 집단으로 화했다. 수족을 자처하려 드는 영리한 자들이 있어 굳이 무리를 통솔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연구라는 명목하에 그곳에 존재하기만 하면 되었다.
오로라의 연구원들은 노동력을 동원하면 년 단위로 걸릴 만한 신전을 고위 마법으로 순식간에 만들어낸 그들의 지도자를 존경했다.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는 대신전은 초월자를 받드는 사제들의 신전에 뒤지지 않았고, 신전의 안팎에 연구거리는 한가득 쌓여있었다.
모두가 하얀 마법사라 부르며 따르는 그의 곁에는 언제나 작은 소년, 어떻게 보면 청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은월이라 이름을 밝힌 남자는 연구원들의 기대와 달리 대단한 힘이나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얀 마법사의 시중을 드는 하인 격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린 그들의 관심은 곧 사그러들었다.
물론 개중에는 금방에라도 사라질 것만 같이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풍기는 은월에게 인간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는 이도 있었다. 말단 연구원인 비어완이 그에 속했다. 이런저런 인적사항을 물어보다가 은월이 정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비어완이 물었다. " 그럼 너는 무슨 정령이니? " 정령이란 존재는 신전 뒤쪽 숲에서 글라시움을 품은 평온의 정령 정도밖에 알지 못했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비어완의 물음은 사실 정령의 존재 의의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은월은 그에 대답하지 못했다.
4
그 날 밤, 하얀 마법사의 연구실에서 은월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탄생의 순간으로. 하얀 마법사가 자신을 부를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양 선 채로.
" …별. "
뜬금없는 한 마디에 흘긋 시선이 돌아왔다.
" 오늘은 어디서 별이라도 보고 왔습니까? "
" 비어완이 물었어, 나는 무슨 정령이냐고. 나는 운석으로부터 태어나 바람에 휘감겨 살아왔어. 나는 무엇을 위해, 무엇이기에 존재하는 것인지, 조금 전에 정했어. "
" 보통 요정족은 존재의의를 스스로 정하지 않는데… 역시 당신은 특이하군요. 그런데 별이라니, 운석 말입니까? "
" 응… 아니. 나는 별을 찾기 위해 존재해. 반짝반짝 무엇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별. 그게 내가 태어났던 운석이냐면, 어쩌면 맞을 수도 있지만, 아닌 것 같아… "
" 그렇습니까. "
하얀 마법사는 더이상 대화에 시간을 지체하지 않겠다는 듯 거대한 마법석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은월은 다시 한 번 읊조렸다. " ……별. "
5
평온의 숲에서 그는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이전까지 탐독해온 연구와 연관성은 존재하나 그 끝은 분명히 다를 것이었다. 빛을 추구하며 보다 주위에 도움이 되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던 과거와 달리, 대신전에서의 연구는 조각들을 만들어냈다. 작은 조각들은 모이고 모여 이내 더미를 이루다가 그의 주문 하나에 선을 잃고 뭉뚱그려졌다. …시작은 작은 그림자였다.
인간이나 동물과는 다르지만 그 존재가 느껴지는 몬스터의 형태로. 그는 그것을 방류했다. 뒤이어 생겨난 부산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신전의 연구실에 틀어박힌 낮 동안(평온의 숲에서 낮의 의미가 없긴 해도) 신전 앞 숲을 거닐다 돌아온 은월은 그가 만들어낸 존재를 보고 떨었다. " 저것은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겁니다. 나의 의사가 당신에게 악의를 갖게 만들지 않으니까. " 그가 말했지만, " 이건 악의의 문제가 아니야. 저건 정령과 반대되는 존재야. " 정령의 공포가 본질적임을 읽어낸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 …어둠의 파편이기 때문에? "
하얀 마법사의 물음에 은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대답 대신 그가 막 풀어놓은 몬스터에게 손을 가져다 댔다. 치익. 화염에 타오르는 소리가 났다. 정령의 창백한 손이 부패된 고기처럼 변색되었다.
" 이것의 존재 자체가 정령을 물들게 해. 소멸이 아니라, 태초의 본질이 무엇이든 저렇게,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어버릴 거야. "
잘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그것만을 알겠다며 은월이 하얀 마법사를 보았다. 말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는 청정한 눈동자. 하지만 그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6
차가운 정제된 암석을 발바닥으로 느끼며 은월은 천장 끝에 걸터앉았다. 하얀 마법사가 이따금 연구에 매진하다가 신체적인 제약으로 인해 두뇌가 녹아내릴 지경이 되면 위로 올라와 하늘을 바라볼 만큼, 이곳에선 넓게 펼쳐진 하늘이 잘 보였다. 오늘은 달이 없는 대신 별이 밤하늘에 빼곡히 들어찼다.
뒤에서 나는 인기척에도 은월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곳에 올라올 사람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잔잔한 하늘, 개울물처럼 일렁이는 밤바람.
" 오늘은 은하수가 올라오는 밤이지요. "
하얀 마법사의 연구가 비틀린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한 최근 며칠 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가 들렸다. 잔잔한 미성이 곧게 떨어졌다.
7
" 떠나지 않습니까? 나는 당신을 어둠의 제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
하얀 마법사의 목소리에 담긴 의구심은 매우 드문 것이었다. 불현듯 그의 푸른 눈동자가 보고 싶어져 은월은 고개를 돌렸다. 그를 마주하고, 보았다.
바람을 닮은 눈동자에 내려앉은 밤하늘에서, 그 무엇보다 반짝이는 별들이 빼곡하게 빛났다.
그것은 찰나. 순간의 각도에 의해 우연히 닿은 빛의 기적. 은월은 웃었다.
" 아니… 당신의 눈에 별이 빛나고 있으니, 그걸로 충분해. "
보통 심성을 가진 자라면 낯간지러워 할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은월은 뒤에 솟아있는 장식물에 등을 기댔다. 그것은 천하의 하얀 마법사도 예상치 못한 대답이라, 그는 일순 입을 열지 못했다. 가지런한 호흡을 한 번 머금을 시간이 지나 후, 하하, 웃음을 흘렸다.
" …제가 예상한 범위내의 대답이 아니군요. 과연, 그렇기에 아직까지 이곳에 남아있는 것일 터. "
언뜻 유쾌하게도 보이는 미소가 눈부신 은하수 아래 반짝반짝, 정령의 마음을 옭아맸다.
8
차원의 도서관 에피소드; 하얀 마법사
9
" ……마지막으로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 "
" 하얀 마법사. ……아니, 네 모습을 보니 이젠 그렇게 부를 수도 없겠군. "
" ……검은 마법사. "
소리 없이, 그가 웃었다. 아니, 어쩌면 넘쳐흐르는 어둠이 넘실대는 것이 그의 입가가 올라간 것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몸에 두르고 있던 백색과는 정반대인 어둠과 불길한 자색이 숲을 뒤흔들었다.
가볍게 휘두른 손은 거대한 파도와 같이 솟아올라 살아있는 모든 것을 덮었다. 생명이란 그토록 가벼웠다. …안돼… 숲 너머로 쫓겨나는 바람이 비명을 싣고 흩날렸다.
이것으로 궁극의 어둠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돌아갈 수 없어.
10
황량. 어둠이 덕지덕지 걸린 무성한 수풀 사이로 이제는 신음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온 숲이 숨을 죽이고 제가 품은 어둠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어디로 고개를 돌리든 생명의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깊고 깊은 숲의 어둠, 싸늘하게 식은 몸뚱어리를 붙잡고 울부짖던 소녀의 울음소리마저 아득해진 그곳에서. 유구한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서 초월적인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영혼이 검게 물들었고, 피보다 붉은 안광이 형형히 빛났다. 이제 세상은 두려움에 떨게 되리라. 무수한 생명의 미래를 언제까지고 비춰줄 것 같던 빛이 타락해버렸으니. 냉소하며, 한편으론 고소를 머금듯 그는 조용히 제가 저지른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대지를 덮는 하늘마저 새까맣게 물든 밤.
……그런 그의 곁에. 소리 없이, 기척 없이. 그 어떤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는 작은 정령은 압도적인 힘 앞에 움츠러드는 몸을 애써 일으켜 세웠다. 미약한 움직임에 반응하며 검은 마법사는 낮은 허공에 뜬 정령을 보았다.
'악'을 코앞에서 맞이한 육신은 인간의 형상을 잃고 정령의 빛덩어리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더는 빛나지 않고 어둠 속에서 본질을 뒤틀었다.
" 여전히 별을 찾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
이전과는 정반대의 존재로 돌변했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하얀 마법사로서의 의식이 남아있는지, 아니면 의도적인지 모를 물음이 과거를 담고 정령을 관통했다.
당장에라도 꺼질 듯 웅웅거리던 정령은, 천천히 꾸물거리며, 확실하게. 당장 공포의 이미지로 변모한 앙상한 손아귀에 당도했다. 검은 마법사는 웃었다. " 확실히…… 너의 의사뿐이지. 오롯한 것은. "
11
이제는 없는……
그럼에도 그곳에 있는……나의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