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기 좋은 날
날이 맑다.
아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도 같다. 어쩌면 물안개가 끼어있을지도 모르겠다.
새소리나 알람이 없는데도 언제나와 같은 시각에 몸은 정신을 일깨운다. 한켠에 널브러진 요를 집어 다시 덮으려다 쓸데없는 소모라는 사실을 느리게 깨닫고 손을 놓는다. 이마가 지끈지끈 울리고 있다. 이마에 손바닥을 짚은 채로 얼마간 누워있다가 몸을 일으킨다. 창가의 습한 기운이 얼굴에 부딪혀온다. 창을 열까, 고민은 짧다. 침대에서 내려와 굽은 동선으로 방을 돌아나간다. 아직 어두워 보이는 것이 없어도 발걸음에 망설임 하나 없다.
그제 넣어둔 바구니 속 빵으로 울리지 않던 허기를 채운다. 이틀 사이 겉이 딱딱하게 굳은 빵을 억지로 입에 욱여넣으며 부스스한 머리를 하나로 묶어올린다. 편하기야 묶지 않는 편이 익숙하고 좋지만, 입술에 들러붙는 잔머리가 신경쓰인 탓이다. 마지막 한 입까지 목구멍으로 넘긴 뒤 헤묵은 갈증을 미지근한 물로 축인다. 뭔가를 먹으니 잠이 어느 정도 깬다. 조용한 식탁 앞에서 잔잔한 공기의 떨림을 듣는다. 스산하게 울리는 소리는 밖에서 들어오고 있다. 잠시 굳은 근육을 풀고, 침실로 들어가 창문을 연다. 축축한 바람이 뺨을 때린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그렇다고 가을 하늘마냥 깨끗하지도 않고, 흐리게 물을 먹은 색감이다. 언젠가 요정들의 숲에서 맛보았던 물기가 눈과 코에 선연하게 들어온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부푼 폐를 쥐어짜내듯 내쉰다. 마지막까지 몰려있던 수마가 걷힌다.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수백 번, 수천 번은 맞이한 아침은 언제나와 같다. 사건 없는 그 평화로움에 감사하는 마음가짐도 스러질 즈음, 은월은 이 인적 없는 호숫가에서의 생활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잎이 빠지는 가을엔 앙상해보여도 나무 사이 간격은 제법 촘촘하게 들어찬 숲, 들어갈수록 산맥이 태를 드러내는 깊숙한 곳에, 은월은 자리잡았다. 세속을 돌아다니며 만난 옛 친우들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한 사람은 아예 같은 시간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리저리 헤매고, 모든 일의 원흉을 부활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저지하고, 누군가를 구하고, 누군가를 쓰러뜨리는 나날의 뒤에. 세상은 조용해졌다. 검은 마법사를 추종하던 무리는 격렬하고 지긋지긋한 전투 끝에 뿔뿔이 흩어졌다. 한때 군단장으로 불리던 자들의 생의 마지막 흔적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사람들과 단체들. 악의 무리가 사라진 세상은 조용히, 나름대로 시끌벅적하고 평화롭게 돌아갔다. 검은 마법사 자체가 소멸된 것은 아니나 당장 이 시대에 나타날 수 없다는 사실이 널리 퍼지고, 악의 무리가 사라진 세상은 조용히, 나름대로 시끌벅적한 평화 속에 잠겼다. 영웅으로서 대접 받고 영향력을 행사하던 자들은 각자가 바라던 생활로 돌아갔다.
은월 역시 시류에 휩쓸리듯 평화를 맞았다. 애당초 홀로 떠돌던 몸이라 고요함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지만, 공포와 두려움이 공중에 떠다니던 세상이 나른한 포자를 덮어씌우니 가장 기본적인 긴장이 풀렸다고나 할까. 손을 빌려주어서 고맙다고, 은인의 이름을 알고 싶다고 묻는 늙은 하프링에게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은월은 차원의 문을 넘었다. 몸 언저리에서 소중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여전했으나 절망이 야금야금 좀먹어가던 이전과 달리 마음은 평온했다. 모든 것이 끝난 뒤의, 기분은.
자신의 존재가 만악의 근원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이기에 느끼는 불편함은 더이상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다른 이들에겐 여전히 불안함과 공포로 남아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은월은 차원을 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더는 아무래도 좋다는 자포자기식 마음가짐이 아닌 묘한 후련함이 그를 가득 채우고 동시에 비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후 수년, 또는 십수 년이 지나는 세월 동안, 은월은 새로이 자리잡은 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세상은 더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를 기억하는 자도 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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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끝나고, 검마가 더는 위협이 되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가 도래했을 때, 조용히 살아가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리는(죽어버리는) 은월이 쓰고 싶었다. 는 머리 아파서 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