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프/ 온전한 시간 0
*리퀘박스1
*짧짧하게 이어집니다. 프리드는 이번만 나오고 더이상 안 나와요.
오랜 옛날 풍(楓)국을 다스리는 왕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등극한 왕은 현명한 통치로 잦은 이국의 침입에 어수선한 나라를 안정시켰습니다. 왕의 곁에는 나라 제일의 검객이라는 호위무사가 항상 붙어있었습니다. 호위무사는 왕의 오랜 친구였고, 몸이 약한 왕을 밤낮으로 지켰습니다. 현왕의 치세는 오래도록 지속될 것만 같았습니다. 어느 여문 가을날, 간소한 편전 앞에 한 사내가 허리 숙이기까지는 말이에요.
" 헌납이라고요? "
" 예, 폐하. "
왕의 앞에 바쳐진 사내는 여인이라 하여도 이견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끝없는 백설 같은 머릿결과 창공을 담은 두 눈. 어두운 목재 위로 드리워진 색의 대비가 더없이 눈이 부셔 왕의 앞에 늘어선 신하들마저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라. 요구사항이 있을 터인데? "
" 그것은, 폐하. 분에 겨운 말씀이십니다. 다만 현왕의 태평세대를 기원하며 저희 상단이 이국에 조금 오래 머물고자 작은 허락을 내려주신다면 하늘에 더없이 감읍할 것이옵니다. "
" 좋아요. 나라의 상권에 도움이 되겠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지. 물러가세요. "
상인이 허리를 조아리고 물러난 뒤 왕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태도로 집무를 보았습니다. 그간 하얀 사내는 그를 데리고 온 상인처럼 몸을 조아리지도, 먼 허공을 바라보지도 않고 한결같은 곳을 향한 채 장지문 밖에 앉아있었습니다. 한 곳, 왕을 향해서.
집무가 끝날 즈음 신하들이 물러나고 장지문 안쪽 왕의 공간은 사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서명을 마치고 기지개를 펴는 왕에게 그의 호위가 귓말했습니다. " 정말 받으실 겁니까? " " 뭐가요? " " 저 사내 말입니다. 무희라고는 하나 성별이 명백한 것을. 그리고 말 낮추시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다. " " 싫은데요. 은월도 둘만 있을 때는 편하게 말하라니까 계속 높이면서. " " 폐하시잖습니까. " " 내가 폐한데 뭘요. " 호위가 말로써 왕을 이기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나직한 한숨과 함께 호위가 항복했습니다. " 제발, 프리드. " " 응. " " 진심이야? " " 안그래도 왕이 고자다 뭐다 말이 많았으니까 이참에 조금 가라앉혀보지 뭐. 우리나라가 계간에 인색한 것도 아니고. " 왕은 태평하기만 했습니다. 말은 쉽게 해도 결코 가벼운 충동으로 미래를 일구지 않는 성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호위는 말없이 읍하며 편전을 나서는 왕을 뒤따랐습니다.
드르륵. 장지문이 열리자 하얀 사내가 눈만을 살짝 올려 왕을 보았습니다. " 고개 들어도 좋아요. " 말에 따르는 그는 왕보다도 신장이 커 호위에 이르는 듯했습니다. " 크네. " 답 대신 푸른 눈매가 휘어졌습니다. " 무희라면 춤도 잘 추겠네? " 순전한 호기심이라고 하기엔 짖궂음이 담겨있었습니다. " 원하신다면. " 사내다운, 그러나 나직하여 귓가에 고이 잠겨드는 목소리였습니다. 왕과 그의 그림자 그리고 나열한 신하들이 지켜보는 좁은 복도에서 사내는 잘도 부딪히지 않고 몸을 움직였습니다. 부드럽고 유려하게. 한 자락 나부끼는 비단처럼, 바람에 흩날리는 안개처럼, 곡선을 흘리는 호접처럼. 짧은 춤사위가 사뿐히 가라앉고 침묵만이 남았습니다. 짝. 짝짝. 작은 박수가 천둥처럼 울렸습니다. 왕의 호위는 한순간이나마 제 시선을 앗았던 사내로부터 시선을 당겼습니다. 그가 평생을 목숨 바쳐 지켜야 할 푸른 눈이 기이한 열기에 휩싸인 것을, 당시의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저 아름다운 사내가 기어코 왕의 흥미를 끄는 데 성공했구나. 얼마나의 안줏거리로 이 정계에 머무를까. 그 정도의 짐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길어야 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하얀 사내는 두고두고 왕의 옆자리를 지켰습니다. 그에 많은 이들이- 특히 왕의 혼약자로 내정되어 있던 에우렐의 사람들이- 불안해하는데도, 왕은 자신을 향한 어느 걱정거리에도 확답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하다못한 물음이 왕의 호위를 향했지만 그라고 별다른 대답을 해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역시 왕에게 끝없는 의문을 토로하고 싶은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 폐하께서 또 무희를 부르셨다. "
" 예. 작일과 같이 오로라 지당에서 독주를 즐기겠다 하셨습니다. "
차라리 왕이 돌변하여 희대의 난봉꾼처럼 굴었다면 강압적으로라도 무희를 떼어놓았을 텐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왕은 여느 때와 같았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홀로-정확히는 호위와 함께- 향유하던 하루의 여가를 무희에게 할애하는 폭이 늘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폭은 조금씩, 그러나 분명한 상승세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왕이 무희의 춤사위를 눈에 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안그래도 병약에서 겨우 한 발짝 멀어져있던 왕의 건강은 눈을 밟는 것처럼 소리없이, 차근히 흔적을 남기며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달이 지나고 해가 지나 자잘한 어수선함이 가실 즈음 왕의 낯은 당장이라도 꺼질 것처럼 희게 깜빡거렸습니다. " 프리드. " 오로라 지당, 언제나처럼 정자에서 하얀 사내를 기다리는 왕에게 호위무사가 말을 걸었습니다. 듣지 못해 시선이 허공을 부유하는 것을, 다시 한 번. " 프리드. " " ...왜? 은월. " " 괜찮은 거야? " 얼마만에 듣는 이름인지 현실적인 감동에 빠질 틈도 없었습니다. " 뭐가? " " 알잖아. " 비식 웃음이 퍼석거리며 부서졌습니다. " 이젠 너까지 신하들과 같은 소리를 하려고? 제발, 난 괜찮아. 멀쩡히 사고하고 집무도 보고 있다고. " " 알아. 하지만 근래의 넌. " " 난? " 호위가 망설임 속에 말을 잇기 전에, 무희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고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결국 호위는 왕에게 그 어떤 간언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무희의 머리카락만이 춤의 끝 잔상으로 남았습니다.
" 하실 말씀이 있다면 새앙쥐마냥 뒤를 쫓지 마시고 사내답게 나서 이야기하시지요. "
어둠 속의 소리없는 기척을 읽어낸 사내에게 놀라울 것은 없었습니다. 호위무사는 훌쩍 바닥으로 뛰어내려 그를 마주했습니다. 무심하기로 소문난 호위무사의 자색 눈이 형편없이 일그러져 보였습니다.
" 무슨 술수를 부리는 게냐. "
" 술수라니요. "
" 부정은 당치 않다. 네가 도달한 이후 궁의 생기가 현저하게 흐려지는 것을 알아. "
단정하는 말에 하얀 사내가 흥미로운 듯 입꼬리를 올렸습니다.
" 제가 요술이라도 부린단 말씀이십니까? 감정이라봐야 고작 세 마디 인사가 전부라던 하늘의 그림자치고는 허술한 추측이시군요. 근거 없고 그악한 감정만 가득하니 사실은 추궁하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
" 삿된 입 놀리는구나. 네 부정 않는 것을 알지 못하리라 생각하나. "
그에, 사내가 한 걸음 호위무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가 경계함에도 다시 한 걸음. 또 한 걸음. 서자 한 치의 거리만이 남았습니다. 비등한 시선이 살짝 기울어져 속삭였습니다.
" 그 삿된 것의 조악한 춤사위에 매번 혼을 흘리는 것은 누구랍니까. "
하얀 사내는 알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한 목숨과 긴 시간과 마음 모두를 왕에게 바치리라 맹세한 호위무사의 흔들림없을 눈길이, 그가 왕에게 춤을 바칠 때마다 한풀 꺾여 비껴내리는 사실을요. 금세 되돌아가 감쪽같은 시늉을 하지만 그렇다고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왕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그 지루한 의식 가운데 근래 들어 아주 즐거운 줄다리기였으니까요. 그와 저 그림자의,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줄다리기 말입니다.
" 부정해보아야 흥만 돋울 뿐입니다. 편히 인정하면 될 것을. "
" 헛소리 마라. "
" 헛소리입니까? "
" 그렇다. "
" 그야 두고 볼 일이지요. 당신은 왕의 그림자라 하였지만, 빛이 지고 나서고 그림자가 고일까. 제법 익살스러운 의문입니다. "
의뭉스런 말과 함께, 하얀 사내는 밤이 깊음을 이유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남겨진 호위무사는 얼마간 기척만을 겨우 숨긴 채 덩그러니 서있었습니다. 제 감정을 부러 흔들려드는 간악한 무희의 말 따위, 흘려들으면 될 것이었습니다. 그 나직한 목소리를 곱씹는 스스로에게 이유를 만들어대면서, 그렇게. 깊어가는 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
" 아, 잠시. 옛 기억이 떠올라서요. "
" 그렇군요. 방은 어떠신지요? 식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
하얀 사내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점주가 방해 않겠다 물러난 이후 풀벌레 소리만 간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