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dered-poison 2
*여은월
*모 동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은월→팬텀→아리. 편마다 바뀌는 커플링(...
비가 내린다. 추잡한 습도가 살갗을 휘감으며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날씨가 최악이야. 배부른 투정을 부리며 커튼을 당긴다. 차라리 방의 등불만으로 밝혀지는 시야가 훨씬 넓다. " 왜, 그 날도 이렇게 비가 오지 않았나? " 침대 기둥에 기대어 앉아 궐련을 문 사내의 얼굴은 태평하기만 하다. 얇은 커튼을 뚫고 찬바람이 훅 밀쳐드는데도 창문을 닫지 않는 건 방 안에 가득한 정사의 냄새를 비우기 위함이다. 젖은 시트를 한구석으로 밀어놔 침대 위는 휑한데도 고작 가운 하나를 걸치고, 그나마도 가슴팍을 훤히 드러낸 사내의 낯은 여전히 웃고 있다. " 그래서 더 싫다는 거예요. " 좋은 기억은 아니었으니까. 사내를 흘기면 뿌연 연기를 입술 모양으로 내뱉으며 어깨만 으쓱인다. " 하지만 운수 좋은 날이었잖아? 결국 물주 하나 거하게 잡아 방도 이 꼭대기층으로 바뀌었지. " 새삼스럽지도 않다며 다시 한 번 연기를 뱉은 사내가 팔을 들어 고개를 까딱인다. 그 귀한 실크로 짠 가운을 입은 소녀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걸음을 옮긴다. 남녀의 잠자리는 한밤이 아닌 어느 때든 시작되는 것이었다.
제 실력과 술수만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쥔 사내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소녀를 지명한 지 열흘째 되던 날이다. 길고 긴 첫날밤 지쳐 정신을 놓은 소녀를 혼자 내버려두고 방을 내려온 사내는 기녀들을 관리하는 자로부터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방에 머무르는 힘없는 소녀의 이름을 들었다. 그는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소녀를 찾았고 소녀가 허하지 않았음에도 아직 듣기 어색한 이름을 부른다. 감추어진 달이라니 제법 운치 있잖아. 그 은은할 유백색 별이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소녀를 호출한다. 소녀로서는 그가 자주 찾을 수록 좋은 일이었기에 기꺼워하면서도 꺼림칙함을 애써 숨기는 기색이다. 타인으로부터 붙박힌 이름이 타인에게서 불리는 것에 어색함이 가실 즈음, 소녀는 또다른 타인으로부터 사내의 이름을 듣는다. 사내는 스스로의 신상에 대해 꺼내는 법이 일절 없었기 때문에, 교합 도중 무심코 입에 담은 이름자에 사내가 놀란 듯 의아함을 띄우는 것도 당연하다. " 원래는 창부 입에서 불리우면 기분이 나쁜데 이건 의외로 괜찮은걸.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넌 불러도 돼. 단 침대 위가 아닌 곳에서만. " 그리 말하며 소녀의 위에서 내려가는 사내, 팬텀의 얼굴에 미미한 불쾌와 당혹감이 섞여드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목소리가 다르니까 깨닫게 되거든, 다른 사람이라는 걸. 꽤 시간이 흐른 후에 깨우치는 팬텀의 이야기다. 이유를 알지 못해도 그의 기분을 읽어낸 소녀는 답이 없다. 하지만 팬텀은 소녀가 제 말을 수용하여 태도를 고칠 것을 알기에 그 이상으로 수를 쓰지 않는다.
팬텀은 소녀의 단골이 된다. 거의 후원자와 맞먹을 정도의 금액을 쓰면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수표를 던진다. 덕분에 소녀의 방은 점점 층을 높여 입구에서 가장 멀어 가장 보호받으면서도 가장 빠져나가기 어려운 꼭대기에 이른다. 그때까지 소녀는 이 밝은 낯을 한 사내의 시중을 들었다. 몸이 가까우면 마음도 가까워지기 마련이라는 속설처럼 분명 경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무런 대가 없이─육체라는 것이 있긴 하나 둘러보면 소녀보다 육감적이고 아름다운 여체는 이 가게에 수두룩했다─ 소녀에게 돈을 썼다. 미미한 혹시, 가 미약한 기대감으로 바뀌는 순간을 소녀는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것은 스스로의 마음을 가시넝쿨로 옥죄이는 결과를 낳는다.
" 한 사람만 바라보는 남자라니 얼마나 로맨틱해. 그녀는 너무 고귀한 태양이라 감히 손도 대지 못한다지. " 시시덕거리는 질투 어린 속삭임을 듣지 못했다면 좋을 것을.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긍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녀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항상 몸만 취하고 이름은 허하지 않는 사내, 꾸준히 지명해도 결코 후원자로서 이름을 올리지 않는 사내, 아마도 저 높은 하늘에 걸린 태양을 닮은 여인을 평생의 레이디로 삼은 사내. 모두 같은 틈바구니에 소녀는 티끌처럼 작은 알갱이로 끼어 있었다. 즐기지 않는 산책길 저잣거리의 한 노점에서 집어든, 사내를 닮은 푸른 브로치의 꽃은 베고니아가 아니라 상사화였던가. 시간이 흘러 또다른 흐름에 휩쓸려 짐을 정리하다 발견할 때까지, 브로치는 깊은 서랍 속에 먼지를 얹고 색을 잃는다. 소녀는 이후로도 수없이 팬텀의 레이디를 듣는다. 실제 그녀를 보게 됨은 시간이 흘러가는 물결 속에서.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나가는 어느 날. 새벽부터 내리는 비는 온세상을 이곳처럼 검게 물들인다. 한바탕 뒹굴고 미리 배치된 과일과 물 따위로 입술을 축인다. 뭉툭한 과도로 배를 잘라 씹던 팬텀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한다. " 요즘 이 구역도 시끄럽던데. " 창틀에 앉은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밖을 향한 채라 혼잣말 같음에도 소녀는 고개를 든다. 그가 던지는 정보는 무엇 하나 거를 것이 없다. " 북쪽의 귀족이랬나, 하나가 이쪽을 휘젓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뭘 찾는지 아닌 척해도 급하게 들쑤시는데 주인장이 가만히 내버려두는 걸 보면 뭔가 있단 말이야, 분명. " 팬텀은 이곳의 지배자를 가볍게 주인장이라고 불렀다. 싸게 들리는 호칭이지만 속에 담긴 경외와 불편함을 기어코 수긍한 지 오래다. 어느 순간 나타나 그림자 거리를 집어삼킨 남자를 대부분은 검다는 수식어를 붙여 3인칭으로 부른다. 누구도 이름 아는 이 없음에도 그 영향력만은 무섭도록 크고 강하다. " 나야 내 상권만 건드리지 않으면 상관 없지만. " 제 것에 한해서 민감한 사내가 화제를 끝낸다. 소녀 역시 대수롭지 않게 흘려넘긴다. 꾹꾹 새겨 눌러담아도 겉으로 태를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소녀가 가지고 키운 가장 큰 무기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소녀는 낯선 노인과 마주한다. 유일무이한 지명자를 두었다 해도 가게 일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라 종종 자리를 내어 접대하곤 했지만 그런 치들과는 다르다. 부러 허름한 옷을 걸쳐도 훤칠한 키와 정갈하게 타넘긴 흰 올백이 이곳 특유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 눈에 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당장 귀로 들어온 말의 의미를 곱씹느라 바쁘다. " 백작이요? " " 그렇습니다. 이 왕국에 단 셋뿐인 후작가를 외척으로 둔……… " 엄청난 의미를 가진 말을 단어 하나하나 붙잡아둬야 하는데 도통 소리가 해석되지 않는다. 소녀의 혼란으로 뒤섞인 이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말을 멈추지 않는다. 그가 말을 마치고 소녀가 내왔던 차를 비로소 한 모금 들 때가 되어서야, 소녀는 머리 아닌 입 속에서 짓이기던 말을 정리한다. " 그러니까 아버지, (잠시 멈칫했다 언제 끊겼냐는 듯 잇는다) 아버지가 백작가의 사람이었다는 말이죠. 삼남, 세번째의… " 장황하게 늘어놓은 정수는 고작 한 문장이다. 물론 그 긴 수식들로부터 자잘한 얻은 정보도 많다.
무슨무슨 백작은 전장에서의 공으로 작위를 얻은 이대째로, 두 번의 재혼에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다. 어엿한 장남이 후계자로 기사 서임을 받아 가주 업무를 대신하고 병약한 차남이 침대에서 앓을 동안 삼남은 창가를 나돌아다녔다. 그것만이었다면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 하필 여자 하나가 잘못 꼬여 아이가 생겼다. 귀족사회는 그네들 푸른 피 이외에는 철저히 배타적이다. 여자가 어떤 꿈을 꾸었든 제 혈육이라 인정치 않음에 아이는 버려졌고, 이후의 흔적은 창관을 따라간다. 본래라면 존재한 기록조차 남지 않을 흔적을 쫓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백작가에 연속으로 닥친 불운 때문이다. 서늘한 이슬비가 내리던 어느 날 한 통의 서신이 백작가를 뒤집는다. 장남의 낙사 소식이었다. 장남은 약혼녀를 두었을 뿐이었고 집안에는 어린 다음 세대가 없었다. 차남은 병이 깊어 올해를 넘기기 힘들었고 삼남은 외국으로 나가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물러나있던 늙은 가주가 부랴부랴 밀린 업무를 보긴 했지만… 구구절절한 사연의 결론은 간단하다. 행방을 알 수 없는 삼남의 사생아, 현 백작가의 유일한 혈육인 소녀가 돌아와─이 대목에서는 비소만 나왔다─ 가문을 잇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쪽에서도 반목은 생각도 않고 있을 테고, 아무렴, 창기따위보다 귀족가의 후계자라는 타이틀이 얼마나 탐스러운가. 그럼에도 소녀가 망설임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한 감정의 끄트머리에 있다.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는 모습에 노인이 도움을 청하듯 지금껏 아무런 소리 없이 앉아있던 남자를 본다. 검고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어깨 너머로 흘러내린 그의 붉은 눈이 곰곰한 생각에 잠겨 있다 돌아간다. 뜻밖에도 그가 말하는 것은 하루의 유예다. 노인은 이해 못 할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나, 그야말로 정적만 남은 방. 이전까지 이름만 겨우 들어본 이곳의 주인이 제의한다. 소녀의 망설임을 알고 있는 것처럼, 가볍고 묵직한 유혹을.
팬텀이라는 상인의 상권은 넓고 넓어 바다 너머에까지 뻗쳤지만 이 나라에서 그가 주를 두고 있는 영지가 있다. 검은 주인의 호의로 마차를 빌려 팬텀의 거처에 당도한 소녀는 온나라가 장마로 묵직한 가운데 먹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정원을 본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색색의 꽃봉우리가 기울어진 그곳에서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어째서 천둥처럼 내리쳤나 모를 일이다. 소녀는 팬텀의 레이디가 가진 금발이 얼마나 아름답게 물결치는지, 살포시 입을 가리고 웃는 소리가 마치 진귀한 카나리아의 그것과 비견할 만하다는 것을, 누군가 말로 일러주지 않았음에도 깨닫고 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그녀를 이길 수도, 애당초 이겨본 적도 없다는 사실 또한.
검은 주인은 강압이 아닌 다양한 수단으로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종을 움직일 줄 알았다. 그는 한 번 제 손속에 둔 어린 창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소녀는 감히 그에 억울해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이제는 겨우 익숙해진 분과 꽃의 향을 품에 넣으며 분명 깨닫고 있는데도. "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예요? " 지나간 과거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소녀는 물음을 삼키지 못한다. 텁텁 고인 지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다. 검은 남자는 웃는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도 그것이 전부였다.
소녀는 백작가로 향하는 마차에 오른다. 챙길 짐이 한 몸뿐인 것에 의아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서랍 한구석 푸른 브로치는 제 방을 맡아 청소했던 아이에게 준다. 연고 없이 가게의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 묘한 동병상련을 일으켜 제 담당으로 거두어들인 아이다. 정말 가져도 돼요? 동경과 의구심이 동시에 담긴 어린 눈에 자신은 어떻게 비칠까. 소녀는 대답 대신 낮은 머리를 한 번 쓰다듬는다. 홀가분하기도 하고 허하기도 한 이 마음의 이름을 그녀는 모른다.